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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자결주의의 원조는 프랑스 혁명이다.

category # 역 사 2018. 3. 2.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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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자결주의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


20세기에 접어들며, 한 나라의 운명은 그 땅에 살고 있는 민족들이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 자결주의가 널리 퍼졌다. 역사학자들과 법학자들은 민족자결주의의 기원을 1차세계대전의 폐허와 전후처리에서 찾았다. 패전국들이 지배하고 있던 동유럽과 아시아의 광범위한 영토를 재편하기를 원했던 승전국, 그 중에서도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을 민족자결주의의 제창자로 보았다.


1차 세계 대전과 우드로 윌슨의 '승리 없는 평화'

 

이후 민족자결주의는 UN헌장에도 삽입되었다. 그리고 UN이라는 조직의 목적이 바로 민족 간의 평등과 자기 결정의 원칙에 대한 존중에 기초간 국가 간의 우호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민족자결주의의 뿌리는 그 보다 조금 더 오래전인 프랑스 혁명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왕권신수설과 프랑스 혁명


중세를 거쳐 20세기 초까지 유럽에서, 오늘날 사람들이 자기의 집을 소유하고 있듯, 통치자들은 영토(국가)를 소유하고 있었다. 한 나라, 혹은 한 영지는 통치자의 결혼, 상속, 세습에 따라 소유자가 바뀌기도 하며, 심지어 매각될 수도 있었다. 오늘날의 부동산 거래와 다른 점은 전쟁을 통해서 강제로 소유권을 강탈할 수도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신으로 부여 받은 신성한 권리인 통치권이었지만, 인간들 사이의 힘 겨루기로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유머라면 유머 포인트이기도 했다.

 

이러한 특징은 당시의 법적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18세기의 국제법에 관한 가장 중요한 책이자 베스트 셀러였던 국제법(1758)에서 에머리히 드 바텔은 정당한 소유권은 고대로부터의 정당한 소유 혹은 세습, 구매 그리고 정상적인 전쟁으로부터의 정복에 따른 것이라 주장했다.

 

프랑스 혁명프랑스 혁명,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그런데, 1789년 프랑스인들이 자극적인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정치 권력의 원천은 국왕이 아니라 프랑스 국민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 주장은 프랑스 혁명의 선언서라고 할 수 있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인권선언)”의 제 3조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

 

모든 주권의 원리는 본질적으로 국민에게 있다. 어떠한 단체나 개인도 국민으로부터 명시적으로 유래하지 않는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

 

그리고 주권자였던 루이 14세는 시민들이 보는 가운데 단두대에서 목을 잃게 되었다.

 

프랑스에 휘몰아친 이 혁명의 결과는 아직까지도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사람들은 입장에 따라 이를 민주주의의 탄생 혹은 공포 정치를 표방하며 수천명의 생명을 앗아간 로베스피에르의 독재의 시작이라 여긴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은 국제법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민족자결과 영토분쟁


프랑스 혁명가들은 신이 부여한 절대적 권한을 소유하고 있다는 국왕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는, 프랑스 바깥의 왕조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었다. 이제 국가와 영지는 일개 재산으로 취급 당하며 팔리거나, 소유권이 이전되어서도 아니되며, 전쟁으로 획득하거나 잃어서도 안됐다.

 

프랑스의 시민들이 프랑스 국경내 정치적 결정에 대한 최종 책임자가 되었고, 이의 연장선 상에서 시민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영토의 지위와 나아갈 방향을 직접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프랑스 혁명가들은 오직 왕조의 통치자들 만이 새로운 영토를 획득하기 위한 침략전쟁을 수행하며, 자유로운 민족은 당연히 평화를 선택할 것이라 여겼다.

 

그러므로 1790년 프랑스는 침략전쟁과 정복을 포기한다는 세계에 대한 평화를 선언했다. 전근대적인 영토분쟁을 완전히 부인한 것이다.

 

처음으로 겪은 것은 외교문제였다. 예를 들어, 혁명 전, 프랑스 국왕은 지중해의 섬인 코르시카를 영토로 편입하였다. 이는 1768년 도시국가였던 제노아와 맺은 구시대적 영토 판매 조약에 따른 것이었다. 1789년 코르시카인들은 공식적으로 프랑스로의 편입을 요청했고, 파리의 새 의회는 이를 승인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이에 대한 법률가들의 해석은 국제법상 국가간(대부분은 왕조 국가)의 영토 거래였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가들은 이 같은 결정은 시민들의 의사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 주장했다. 한 프랑스 관리는 

국제법은 왕 사이의 조약에 근거하지 않는다

 

라 주장하기도 했다.

 

시간이 가며, 새로운 법적 해석이 점차 퍼졌다. 다음은 14세기 이래 교황령이었던 아비뇽이었다. 1790년 아비뇽의 주민들은 교황 비오 6세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고 독립을 선언한 후, 프랑스로의 편입을 요구했다. 처음엔 프랑스 측에서도 이를 주저했다. 교황청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것이라 받아들여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프랑스가 시민들의 소원을 듣기로 했다면 어떤 이에게, 어떤 말을, 언제 들을지 취사선택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이렇게 선언했다. 

아비뇽인의 탄원은 우주의 탄원이며, 자유의 탄원이다.

 

한편 아비뇽에서 파리로 파견된 사절은 프랑스가 얼마전에 있었던 코르시카의 선례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결국 프랑스는 1971년 여름, 역사상 처음으로 아비뇽인들의 진짜 의사를 묻기 위한 주민투표를 실시하였다.




민족자결과 주민투표


구체제의 장점 중 하나는 왕조의 세습 혹은 정복에 따른 소유권 덕분에 영토에 법적 안정성이 어느정도는 보장된다는 것이었다. 아비뇽과 프랑스의 합병 반대파 중 한 사람은 이렇게 경고했다. 대중의 여론이 확실하다면 혹은 선동할 수만 있다면 이제 어떤 합병이든 가능하게 되었다.

 

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주민들이 여론이 다른 국가에 합병을 바라는 것이라면 왜 아비뇽에서 멈춰야 하는가?

 

그러면서 그는 프랑스의 국경과 접하고 있는 다른 지역들을 언급했다. ‘사보이, 니스, 저지대 국가, 팔라틴’, 실제로 이 지역은 1792년에 발발한 프랑스 혁명 전쟁 기간 중, 프랑스에 합병되었다. 프랑스 혁명가들은 매번 해당 지역의 주민들의 의사를 근거로 이를 정당화하였다.

 

윌슨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서는 기존 국가에서 독립하기 위해 민족자결권을 외치고 있다. 당장 작년만 하더라도, 스페인의 카탈루냐인과 이라크의 쿠르드인이 독립을 요구하며 주민투표를 실시했다.


카탈루냐와 쿠르디스탄 분리독립 움직임, 왜 신생독립국가의 탄생은 어려운가


하지만 프랑스 혁명 후기에 나타났던 현상처럼, 강대국이 영토를 강탈하려는 수단으로 민족자결 원칙을 사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2014년 러시아는 크림반도를 병합하면서 크림반도 주민들이 러시아 편입을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 독립 혹은 합병으로 이어진다면 민족자결원칙이 처음 등장했을 때 여러 논란이 발생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국제법의 원칙에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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