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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 대전과 우드로 윌슨의 '승리 없는 평화'

category # 역 사 2017. 7. 24.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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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 없는 평화



1917122,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합동의회의 연단에 올랐다. 그리고 미국은 유럽을 황폐화 시키고있는 유럽의 대전쟁에서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연설을 하였다. 그는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계, 자유로운 바다, 군비 경쟁을 멈추기 위한 국제협약, 평화의 수호자가 될 미국,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승리 없는 평화를 주장하였다.



 

승리는 패자에게 군림하는 강압적인 평화를 의미합니다. 수치를 당하고 패자에게 강제될, 견딜 수 없는 수치를 감수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분노와 고통의 상념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영원한 평화도 아니며 사상누각에 불과합니다.”

 

이는 아마도 윌슨 대통령의 가장 인상적인 연설일 것이었다.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강한 인상을 받았지만, 각 의원들의 전쟁에 대한 태도에 따라 반응이 나뉘었다


의회에서 가장 강경한 고립주의자였던 위스콘신의 Robert La Follette 상원의원은 우리는 지금 세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지나왔다.”고 평한 반면, 와이오밍의 Francis Warren 상원의원은 대통령께서는 아마도 본인이 세계의 대통령인 것으로 착각하시는 것 같군요.”라며 의구심을 표했다. 또한 고립주이자인 Lawrence Sherman 상원의원 역시 돈키호테 같은 발언이라며 연설의 내용을 일축하였다.

 

승리 없는 평화연설은 윌슨의 절박한 외교정책의 절정이었다. 그는 어린시절 남북전쟁을 겪었기에 수십만의 군인의 생명이 갈려 나가는 유럽의 참호로 미국의 군인들을 파병하는 것을 꺼려했다


비록 독일이 영국의 연락선 루시타니아호를 공격하여 128명의 미국인이 죽는 사건이 있었지만, 윌슨은 즉각 독일에 전쟁을 선포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래도 독일에게 잠수함의 활동을 줄이라고 경고하였으며, 미국의 은행들이 영국에 자금을 지원하는 것을 승인하였고, 미국의 군수품들을 영국과 연합국에 수출하였다. 전쟁에서 중립을 지켜야한다는 그의 신념을 배신하는 행위들이었다.

 

1218, 윌슨은 평화협정에 대한 각국 정부의 의견을 묻는 서신을 외국 대사관에 보냈고, 각 조건을 협의할 수 있다고 보았다.

 

<War Against War: The American Fight For Peace 1914-1918>의 저자 Michael Kazin나는 한편으로 윌슨은 독일이 승리하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윌슨은 친영파였다한편, 미국은 유럽에서 전쟁을 수행한 전례가 없지만, 어느 쪽이 이길지는 명백해 보이긴 했다. 그는 계속해서 중재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그의 개인적인 감정이 무엇이든 윌슨은 승자의 관용이 없이는 평화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고 강하게 믿었다. 그랬기에, 승리 없는 평화는 모든 교전국이 치른 무의미한 희생에 대한 교훈을 가지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하는데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참혹한 전쟁의 대가


다시 말해, 유럽의 군인과 시민들의 죽음은 단지 죽음 그 자체여야 했다. 영웅적인 희생도, 순교자적인 헌신도 아니라 소름끼치는 불필요한 죽음이어야 했다. 이는 유럽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서부전선에서 펼쳐진 참혹함이 유럽인들의 정신에 어떤 상처를 남겼는지 알지 못하는 미국인의 너무나도 이상주의적인 생각이었다.

 

윌슨의 연설이 있기 한달 전, 베르뎅 전투가 끝났다. 10개월동안 80만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하였지만, 양측의 전의는 더욱 굳건해졌다. 솜 전투도 곧 끝났는데, 개전 단 하루만에 영국군 전사자만 57천명이 발생했다. 한 프랑스 군인은 전투 중 기록한 일기장에서 참호에서의 삶을 진흙과 피로 가득한 지옥과 같았다고 묘사했다


참호의 교통로에선 한 재수없는 군인이 마치 기요틴에 목이 잘린 것처럼 포탄 파편에 목을 관통 당한 채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체 한구가 더 누워있었다. 곧 군인들이 미친듯이 구덩이를 파 시체 더미를 묻어 버리기 시작했다.” 


전쟁의 대가는 너무나 참혹했다. 상대방에게 이 책임을 묻기 위해서라도 유럽의 강대국들이 완전한 승리 없이 평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윌슨의 이상주의와 반전단체들은 미국이 전쟁의 포화로 끌려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윌슨의 연설로부터 1주일도 지나지 않은 130, 독일은 무제한 잠수한 작전을 발표했고, 독일의 U-Boat들이 미국의 상선과 승객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윌슨은 독일과의 외교관계를 끊는 것으로 대응하였지만, 전쟁을 선포하는 것은 여전히 주저하였다. 하지만 3월까지, 독일이 수많은 미국 상선을 침몰 시키자, 윌슨은 의회에게 독일제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요청할 수 밖에 없었다.

 

역사학자 John Coogan영구적인 평화는 승리 없는 평화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인식한 것은 우드로 윌슨의 천재적인 안목이었다, 반면 윌슨의 비극은 결국 그가 내린 참전 결정이 대전쟁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평화를 불가능하게 한 연합군의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왔다는 점에 있다.”

 


역사학자 Kazin은 비록 윌슨은 1924년에 죽었지만 그의 이상주의가 1920년대와 30년대에도 계속되었다고 주장한다. 켈로그-브리앙 조약(유럽의 국가들이 전쟁을 국제분쟁의 해결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함)과 같은 협상에서 전쟁의 예방을 위한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Kazin은 윌슨의 아이디어였던 국제연맹의 확장된 국제연합의 창설에도 불구하고 2차대전 이후에 베트남과 이라크에서 미국의 이상주의는 메말라 있었다고 평가했다.


 

저는 오늘날 미국인들이 우리 군대가 자유와 민주주의의 도구라는 이상주의적 믿음을 공유하고 있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시리아 내전에서 직접적인 개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반적으로 미국인들은 윌슨주의자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들은 미국이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개입하는 것을 꺼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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