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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덩케르크에서 히틀러는 막타를 치지 못했을까?

category # 역 사 2017. 8. 1.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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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시간



끝나기도 전에 전쟁의 결과가 이미 자명하게 정해지는 경우가 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전혀 몰랐겠지만, 이 것이 바로 1940년 프랑스 북부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1940년 아돌프 히틀러는 영국에게 절대 회복하지 못할 절체절명의 군사적 타격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주저했다. 독일의 기갑부대는 프랑스와 벨기에 연합군을 완전히 박살내고, 프랑스 북부의 항구도시 덩케르크에서 영국군을 완전히 포위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운명의 날이었던 5 22, 독일의 기갑부대는 상부에서 내려온 명령에 따라 진격을 중지했다. 그리고 23일 다시한번 진격 중지 명령이 내려왔다. 누가 왜 이런 명령을 내렸는지는 수 십년 동안 역사학자들의 가장 큰 의문이었다.

 

만약 이 2일동안 독일의 기갑부대가 정상적으로 진격을 계속했다면, 영국군과 잔존 프랑스군을 완전히 섬멸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에 대해서는 거의 이견이 없다. 하지만, 연합군은 이 귀중한 시간을 활용해 덩케르크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했고, 이 기적과 같은 이야기는 크리스토퍼 놀란이 영화로 만들어 최근 개봉했다.

 

독일군 기갑부대가 진격을 중지하기 12일 전, 윈스턴 처칠은 대영제국의 총리로 취임했다. 그러나 그의 자리는 매우 불안정했다. 영국의 국운 역시 경각에 달려있었다. 영국 해외 원정군(British Expeditionary Force)의 성공적인 탈출이 없었다면, 처칠은 아마도 히틀러와의 협상을 주장하던 의원들에 의해 탄핵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처칠과 같은 위태로운 처지에서 극적으로 탈출할 수 있었던 지도자는 역사에서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1945년 히틀러가 파멸하는 운명을 마주했을 때, 히틀러는 1940년 처칠에게 주었던 기적과도 같은 기회에도 처칠로부터 보답이 없었다며 탄식을 토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히틀러가 처칠을 잘 못 생각한 것이었다. 혹은 역사를 너무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었다. 5 28일 허약한 벨기에의 국왕이 히틀러에게 항복의사를 밝혔다. 이 소식을 들은 처칠은 전보를 통해 다음과 같이 보냈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승리이며, 영국은 히틀러가 몰락하거나 우리 스스로가 국가임을 포기할 때까지 전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 그리고 그의 참모진들은 영국의 정계에서는 여전히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 우왕좌왕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독일과 영국간의 전쟁이 필수불가결한 것은 아니라며 히틀러에 대한 유화정책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세력이 날이 갈수록 커져가고 있었다. 실제로 이 사람들은 전쟁이 발발하자, 처칠의 허장성세는 이성적이지 않은 감성적인 태도라 비난했다.

 



벨기에와 프랑스 전역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이었을까?



BEF의 무질서한 후퇴가 이루어지고 있던, 5 21일 프랑스 북부의 도시 아라스(Arras)에서 영국군은 기보합동작전을 통해 독일군에게 반격을 가했다.

 

이 반격에 당황한 것은 훗날 역사상 가장 뛰어난 기갑부대 사령관으로 이름을 남기게 되는 에르윈 롬멜이었다. 롬멜은 게르트 폰 룬트슈테드 야전군 사령관에게 다음과 같이 불만을 토해냈다. 롬멜의 제 7 기갑 사단이 수백대의 적 전차에 의한 공격을 받았다고. 사실 아라스에서의 반격에 동원된 영국군의 전차는 74기에 불과했고, 이 중 독일군의 전차를 상대할 수 있는 신형 전차는 16대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런 예상치 못한 저항으로 인해 받은 심리적 타격은 영국의 전차 그 자체보다 훨씬 효과적이었다. 게르트 폰 룬트슈테드는 히틀러의 승인을 받아, 덩케르크로 향하던 기갑사단의 진격을 중지하고, 아라스의 저항을 먼저 분쇄하도록 명령했다.

 

전선 시찰중인 독일 야전군 사령관 게르트 폰 륜트슈테드


그리고 5 23일 오후 8, 다른 독일 장군이 게르트 폰 룬트슈테드에게 개전 이후 독일 기갑사단의 진격이 너무 빨라 후속 보병사단과의 거리가 너무 벌어졌다는 경고를 하며, 보병사단이 따라올 수 있도록 진격을 중지해 달라는 요청을 보내왔다. 룬트슈테드는 다시 한번 히틀러의 동의를 받아 5 25일까지 36시간의 휴식을 승인했다.

 

이는 BEF를 구한 독일군의 2번째 진격 중지 명령이었다. 그 덕분에 영국군은 덩케르크를 보호하고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할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히틀러가 이를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두번의 진격 중지 명령은, 그 당시 전황을 읽고 있던 독일 장군들의 결정이었다. 독일 기갑 사단은 5 26일 진격 재개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 전날이었던 5 26, 영국에게 또 다른 행운이 있었다. 덩케르크 외곽을 순찰하던 영국군 정찰병들이 독일군 장교가 탑승한 차량이 지나가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영국군의 하사 한명이 권총만 가지고 운전병을 사살하는데 성공했다


차량은 그대로 충돌했고, 독일 장교는 차에서 뛰어내려 그대로 도주했다. 영국군은 차량에서 서류 가방을 발견했고, 이 서류에는 영국군을 격파하고 덩케르크로 진입하려는 독일군의 작전 계획이 들어 있었다. 영국군은 방어선을 강화하며 즉각적인 대응에 나섰다.

 

덕분에 영국군은 독일군의 기습공격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이미 결사항전의 의지가 바닥나고 있었다. 덩케르크에서의 필사적인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바로 그 시점, 파리에서는 항복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는 이런 전쟁에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독일의 전격전이 시작되기 전이었던 5월 초, 한 프랑스 잡지는 프랑스군의 열병식을 취재하고 이렇게 기사를 냈다. “전 세계 군복 중, 프랑스군의 신형 군복이 가장 편안하고 아름답다.”

 

물론 훗날 분석에 따르면, 이 당시 프랑스군은 독일 전차들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을 만한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프랑스군의 전차는 독일 팬저보다 화력이 더 뛰어났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지휘부는 전차에 충분한 지원을 하지 않은 실수를 저질렀다. 전차를 너무 전진 배치해 보급선이 길어졌으며, 집중해서 운용하기 보다는 보병 사단에 배속해 분산운용을 함으로써 독일군의 기갑사단에 무기력하게 당한 것이다.

 

프랑스 군을 지원하기 위해 영국은 본토 방위를 위한 가장 중요한 자산인 공군을 소모했다. 독일군이 영불해협을 향해 진격해오자, 프랑스 정부는 영국에게 공중지원을 확대할 것을 요청했다. 그 시기 이미 프랑스 육군은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그리고 방어선의 급격한 붕괴로 인해 5 19일 이미 벨기에와 프랑스 공군기지에 주둔하던 영국 공군은 철수를 해야만 했다.

 

영국 공군은 이미 막대한 희생을 치루었다. 공중전에 최전선에 있었던 허리케인과 스핏파이어의 손실이 가장 컸다. 유럽 대륙에 주둔하던 영국 공군 파일럿 261명 가운데 75명이 사망했다. 서둘러 철수하느라 기체에 손상은 입었지만 충분히 수리할 수 있었던 허리케인 120여기도 그대로 남겨두고 몸만 빠져나와야 했다. 그리고 단 66기의 전투기만이 안전하게 영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허리캐인 스핏파이어영국공군의 주력전투기 허리케인과 스핏파이어


영국 공군의 지휘부는 처칠에게 히틀러의 광범위한 영국 폭격계획에 맞설 전투기가 거의 남지 않았다는 보고를 했다. 독일은 본격적인 침공에 앞서 대도시와 군사시설에 대한 대규모 폭격을 통해 영국의 저항을 줄이려 할 것이 뻔했다. 5월 말이 되자, 영국 공군의 가용 전투기 수는 480기에 불과했다.

 

5월 마지막 날, 기적에 가까웠던 철수 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덩케르크 항구와 해변에서 영국군을 구출하기 위해 달려온 것은 해군만이 아니었다. 영국 전역에서 민간 화물선과 소형 선박들이 구출작전에 동참한 것이다. 5 29일에는 47,000명 이상의 장병들이 철수했는데 이는 전 날보다 3배나 많은 숫자였다.

 

날이 갈수록 철수에 성공한 인원들이 더 많아졌고, 5 31일 하루에만 68,000명이 안전하게 철수했다. 6 4일까지 총 338,000 여명의 장병들이 영국으로 철수하는데 성공했다. 이 중 125,000명은 프랑스 군이었고, 이들은 나치에 비참하게 항복한 프랑스의 복수를 위한 자유 프랑스군의 주축이 되었다.

 

이 기적과도 같은 덩케르크에서의 철수가 성공했음에도, 처칠은 승리의 축배를 들기에는 이르다는 사실을 6 4일 의회 연설을 통해 분명히 밝혔다철수로 전쟁을 승리할 수는 없습니다.” 



덩케르크가 각국에 준 교훈



각국에 벨기에-프랑스 전역이 준 교훈은 그리 편치만은 않았다. 덩케르크에서의 군사작전은 각국의 군사 가지고 있는 문화적 강점과 약점을 충격적인 방식으로 드러냈다.

 

영국군은 제국주의 시대에 머물러 있는 늙은이들이 최악의 방식으로 지휘권을 행사했다. 이들은 1차 대전이후 전술과 기술이 얼마나 빠르게 발전했는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영국의 군계급체계는 신분제도와 강력하게 결부되어 있었다. 엄청난 수의 나이 많은 장교들은 더 이상 전장에서의 지휘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정을 받았고, 예편되었다. 이를 통해 현대전에 더욱 적합한 패기 넘치는 젊은 자원들이 빠르게 승진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

 

프랑스군의 지휘부의 구성은 정치 부패와 사회 불안으로 뒤덮인 프랑스 사회의 세태와 피로감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 결과 참담한 군사적 재앙을 겪었고, 84세에 이르는 페텡 원수가 이끄는 비시 정권이 구성되었다. 히틀러는 1차대전에서 독일이 항복조약에 서명을 했던 열차로 프랑스 군 지휘부를 불렀다. 그리고 프랑스는 모욕을 감수하며 항복조약에 서명하는 수 밖에 없었다. 6주만에 프랑스는 패배했고 자유를 잃게 되었다.

 

독일에서 전쟁은 과학이었고, 군은 학교였다. 히틀러는 정권을 잡은 직후, 재무장을 추진했고, 프러시아의 군사적 전통과 신무기들의 조화를 이루는데 성공했다. 전차를 발명한 것은 영국이었지만, 전차의 사용법을 제대로 구축한 것은 독일이었다. 독일은 후방에서는 우마를 이용한 수송이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전방에서는 근접항공지원을 동반한 가공할 위력의 전차전을 수행했다.

 

독일군의 유일한 장애물은 다름아닌 히틀러였다. 히틀러는 스스로가 군사적 천재라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룬트슈테드와 같은 독일 장군들은 실패에 대한 히틀러의 반응에 공포를 느끼며 히틀러가 승리의 주역이라는 환상에 장단을 맞추느라 큰 고통을 겪었다.

 

6월 초, 덩케르크로부터 탈출에 성공한 한 영국군 고위 장성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어떻게 BEF가 독일군의 마수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는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 엄청난 포격과 폭격속에서 이렇게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기적에 가깝다.”

 

덩케르크 철수민간 선박을 타고 덩케르크에서 탈출한 영국군 장병들


영국군이 안전하게 철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칠은 영국군이 심각하게 쇠약해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막대한 군수물자를 덩케르크에 남겨두고 와야 했으며, 지휘부에도 막대한 손실이 발생했고, 젊은 세대의 진급이 급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덩케르크에서의 기적은 영국이 고난을 극복하고 끝내 승리를 거두리라는 영국 국민들의 믿음을 불러일으켰다. 이 기적이 사기에 미칠 영향을 모를 처칠이 아니었다. 그는 즉시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영국 정부에서는 비밀리에 영국 정부와 왕실을 해외 식민지로 탈출시키는 계획을 담은 보고서를 만들어 처칠에게 보고한 적이 있었다. 이를 받아본 처칠은 즉각 거부의사를 밝혔고, 그의 메모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들이 우리 섬을 공격하기로 결정한 바로 그날을 후회하도록 만들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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