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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가 벤치마킹한 미국의 인종차별 법안들

category # 역 사 2017. 7. 28.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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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른베르크 법안



1934년 65, 히틀러가 총통으로 취임한지 6개월정도가 지난 시점에, 나치독일의 변호사들이 뉘른베르크 법(반유대주의 법)이라 불릴 법안의 초안을 작성하기 위해 모였다. 매우 중요한 회의였고, 새로운 인종 법안의 탄생 순간을 영원히 기록하기 위해 속기사가 모든 회의내용을 받아 적기 시작했다.

 

이 속기록에는 깜짝 놀랄만할 일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 날의 회의의 많은 시간이 미국의 법에 대해 토의하는 것에 할애된 것이다. 시작부터 법무부장관은 미국의 인종법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했으며, 회의가 진행되면서 참석자들은 미국의 사례를 반복적으로 검토했다. 짐 크로우 인종분리 법안(흑백분리정책)을 제 3제국에도 도입해야 하는지에 대한 토의였다. 또 인종간 혼인을 불법으로 규정한 30여개의 주법에 대한 상세한 토론도 벌어졌다. 그리고나서 미국은 어떻게 니그로몽골리안을 규정하는지를 검토하고, 3제국에서도 유대인을 규정하기 위해 미국의 제도를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 결정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토의했다. 이 회의에서, 미국 모델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는 가장 급진적인 나치당원이었다.

 

이 회의 기록은 미국인들을 뜨끔하게 만들 수 많은 조사되지 않은 기록중의 하나일 뿐이다. 1930년대 초 뉘른베르크 법이 도입되던 시기, 나치의 정책입안자들은 영감을 얻기 위해 미국 법을 참고하였다. 히틀러 본인부터 Mein Kampf(1925)에서 연설을 통해 미국을 인종차별을 통해 건강한 국가를 건설한 모범사례로 언급하기도 했다. 1939년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한 후에도 나치는 미국모델을 꾸준히 언급하고, 참고하였다. 나치는 미국 헌법의 정신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사회에 만연했던 백인 우월주의를 존경하였다. 그리고 1935년 뉘른베르크 법의 공포에는 미국의 영향이 강력하게 반영되었음이 거의 확실하다.

 

믿기 어려운 일일수도 있다. 나치가 다른 나라로부터 인종차별에 대한 교훈을 얻었다고? 그것도 미국에서? 여러 흑역사도 있지만, 어쨌거나 미국은 위대한 자유와 민주주의의 전통이 살아 숨쉬는 기회의 땅이었다. 더군다나 미국의 유대인들은 차별의 대상이 되지 않았고, 미국 역시 결국에는 히틀러를 분쇄하기 위해 막대한 희생을 치루어야 했다.

 


창의적인 미국의 인종차별 법안



그러나 현실은 20세기 초, 미국은 여러가지 창의적이고 적극적인 법률들을 만들면서 전세계적으로 인종차별 법안의 트렌드를 이끌었다는 것이다. 남부의 짐 크로우 법안만이 아니다. 전국적으로도 차별법안이 산재했다. 인종기반의 강력한 이민제한법은 전 세계의 인종차별주의자들의 모범이 되었고, 나치와 심지어 오늘날 유럽의 극우파들도 이를 모방하고 있다.

 

미국의 인종간 혼인 금지 법안은 인종간 결혼을 금지했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형사처벌로 악명높았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법은 남부지방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미국 전역에서 발효되고 있었다. 나치의 변호사들은 이 법안을 주의 깊게 검토하였다. 1936년 나치의 변호사가 언급했듯이, 미국이 유대인을 차별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중국인, 일본인, 필리핀인, 푸에르토리코인, 미국 원주민등을 포함한 수많은 다른 민족들을 ‘2등시민으로 규정하였다. 미국의 이런 일종의 2등시민 제도는 나치의 정책입안자들에게 큰 관심을 끌었으며, 결국 유대인을 2등시민으로 규정한 나치의 법안이 탄생하게 되었다.

 

미국은 1918년 이래로 역동적이며, 현대적이고 부유한 세계 최고의 경제력을 건설하였다. 히틀러와 나치는 미국을 시기하여, 어떻게 미국이 성공하였는지를 배우고자 하였다. 그리고 미국이 성공한 까닭은 인종주의라고 믿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당연히, 미국의 인종차별 법안들이 얼마나 추악했더라도, 나치의 아우슈비츠 같은 인종말살 캠프는 미국모델에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나치는 종종 유럽인들이 북미에 정착했을 때 수천만의 원주민이 몰살당했다는 사실에 대해 만족감을 표현하기는 했다. 어쨌거나 뉘른베르크 법안이 통과되고 수용소가 세워지던 1930년대 초반에는 이것이 아무런 이슈가 되지 못했다. 아직 나치는 대량학살을 하지는 않았고, 단순히 순수한 아리아인을 위한 독일을 만들기 위해 유대인들을 어떠한 방법으로든 독일 밖으로 쫓아내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나치는 미국식 모델에서 확신을 얻었다. 특히 미국의 영웅들로부터. 알칸사스 대학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하던 젊은 나치 변호사 Heinrich Krieger는 독일 법무부의 사업에 기초가 되는 매우 중요한 연구를 발표하였다. 미국인들의 존경을 받는 토마스 제퍼슨과 아브라함 링컨에 관한 내용이었다. 제퍼슨은 1821년에 똑같이 자유로운 두 인종이 같은 정부에 살 수 없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1864년 이전 아브라함 링컨은 공공연하게 미국의 유일한 희망은 흑인의 완전한 이주 뿐이라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이는 유대인의 완전한 축출이 독일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믿었던 나치에게는 아주 좋은 예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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