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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



튤립 버블과 비트코인


얼마전 까지만 해도 비트코인 광풍이 몰아쳤다. 그러나 이 광풍이 새로운 현상은 아니었다. 바로 몇 년 전엔 서브 프라임 모기지, 그 전에는 닷컴 버블, 1929년 대공황, 19세기 철도 버블과 1720년 남해회사 버블까지 역사속에서는 수많은 유사한 사례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버블의 원조 격인 튤립 버블이 있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튤립 버블은 1630년대 네덜란드를 열광시킨 역사상 최초의 금융 버블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은 비트코인을 튤립 버블에 비유하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 튤립 버블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고, 시장의 비합리적인 광풍을 대표하는 아주 훌륭한 예시이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의 트위터에서, 인터넷 게시판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유명한 경제학자의 교과서에서도 튤립 버블은 비슷한 이미지로 그려진다.


 

튤립 버블은 비이성적이었다. 튤립 버블은 광란에 가까웠다. 굴뚝 청소부에서 귀족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네덜란드인들이 빠져들었다. 하나의 튤립 구근이 혹은 튤립 선물이 하루에도 10번씩이나 거래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튤립 그 자체를 원했던 사람은 거의 없고, 이 미친 시장에서 수익만을 바라보았다. 말 그대로 탐욕의 시대였다. 튤립은 미친 가격으로 치솟았다. 어느 순간, 튤립의 가격은 집 한 채의 가격과 맞먹었다. 사람들은 돈을 벌고, 또 잃었다. 16372, 이 미친 광풍의 끝이 다가왔다. 파산한 사람들은 운하에 몸을 던졌고, 정부가 마침내 시장에 개입해 거래를 중지시켰지만, 네덜란드의 경제는 완전히 망가졌다.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중 대부분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과장된 튤립 버블


튤립 버블은 그렇게 비이성적이지 않았다. 당시 급격하게 무역을 확장하며 부를 쌓아가던 네덜란드에서 튤립은 새로운 사치품이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사치품을 소비할 수 있게 되었고, 튤립은 아름다우며, 이국적이고 좋은 향도 있었기에 성공한 자본가들이 자신을 과시할 때 사용하기 딱 적당했다. 그리고 자본가들은 튤립만 사들인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이름난 화가들의 그림과 조각품도 수집했다.

 

튤립의 가격이 상승한 것은 인기있는 줄무늬 혹은 얼룩무늬 꽃잎을 가진 튤립을 재배하는 것은 매우 까다로웠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할 용의가 있는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 높은 가격을 지불하는 것은 전혀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튤립 버블은 광란도 아니었다. 사실, 거래 기간의 대부분은 주식거래소보다는 주점에서 그리고 이웃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조용한 거래가 이루어졌다. 또한 전문적으로 튤립을 재배하고 판매하는 기업들이 설립되었으며, 전문가 위원회가 설립되어 거래를 통제했다. 하나의 구근이 수백번이나 거래되었다는 것은 낭설에 불과했으며, 하나의 튤립이 거래된 횟수는 많아봐야 5번 이내였다.

 

그리고 당시 유럽에 횡횡하던 흑사병이 튤립 버블에 미친 영향은 무엇이었을까? 엄청나게 과장되긴 했지만, 아마 더 이상 도박에 뛰어들 사람의 수 자체를 줄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흑사병은 1936년 절정에 이르렀지만, 튤립 가격은 16371월 최대 상승폭을 기록했다. 아마 유산을 상속받은 사람들이 갑자기 생겨난 돈으로 튤립을 매수했기 때문일 것이다.

 

튤립의 가격은 하늘을 찔렀을 수 도 있지만, 대부분은 아니었다. 가장 비싼 튤립의 가격은 5,000 리라(고급 주택 가격)에 달하기도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튤립 구근을 300리라 이상으로 구입한 사람은 단 37명에 불과했다. 튤립 대부분은 이보다 훨씬 가격이 낮았다.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곤, 부유한 상인 계급 출신이었던 구매자들은 숙련된 노동자 연봉 수준이었던 이 정도 가격을 지불할 여유가 충분했다.

 

세간에 알려진 바와 달리 튤립 거래에 참여한 굴뚝청소부나, 방직공들의 수는 매우 적었으며, 구매자들의 대부분은 숙련된 장인과 같은 고소득자였고, 대게 가족, 종교 커뮤니티 혹은 이웃 사이에 알음알음으로 거래가 이루어졌다. 판매자들 역시 대부분은 아는 사람에게만 판매했다.

 

시장이 무너진 것은, 순진하고 정보가 부족한 신규 구매자들이 시장에 들어와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아마도 공급 과잉과 1637년 첫 5주 동안의 기록적인 가격상승에 대한 반작용 그리고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그 당시 어떤 구근들도 실제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이들 대부분은 땅에 심어져 있었고, 5월이나 6월이되어 꽃이 개화해 실제로 거래되기 전까지, 어떤 현금도 거래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2월 위기 당시 돈을 잃은 것은 다만 장부상 손실에 불과했다. 1636년 여름 이후 튤립을 거래했던 사람들은 사실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었다. 지불을 기다리던 사람들만 손해를 본 것이고, 이들은 이정도 손해 쯤은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운하에 투신하여 자살한 사람도 없었다. 튤립 버블로 심각한 재정적 손해를 겪고 파산에 이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튤립 구매자와 판매자가 파산에 이른 기록이 몇몇 있긴 했지만, 이는 모종의 이유로 파산한 다른 사람의 상품이나 주택을 구매했기 때문이었다. 네덜란드 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입지 않은 것도 분명하다. 정부는 튤립 거래를 중단시키지 않았고, 실제로는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일부 거래인들과 시 의회의 요구에 느리고 우물쭈물하게 대응했다. 네덜란드의 지방법원은 법정 분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당사자간의 협상으로 해결할 것을 제안했다. , 정부의 규제로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튤립 버블이라는 신화


그렇다면 네덜란드 경제가 튤립 버블로 망가졌다는 이야기는 왜 널리 퍼지게 되었을까? 몇몇 작가들과 그들이 쓴 베스트 셀러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1637, 튤립 가격의 폭락 직후, 네덜란드 전통의 풍자 노래가 불리기 시작했고, 튤립 거래인들을 조롱하기 위한 팜플렛이 팔려 나갔다. 훗날 17세기 후반 작가들은 1637년 당시 노래와 팜플렛을 기반으로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이는 다시 18세기 독일의 베스트셀러였던 발명의 역사라는 책에 실리게 되었고, 발명의 역사는 다시 영어로 번역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영국의 작가 Charles Mackay1841년 출판한 Extraordinary Popular Delusions and the Madness of Crowds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책에서 Mackay가 튤립 버블에 관해 쓴 내용의 대부분은 1637년 네덜란드의 풍자 노래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들이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같은 내용이 블로그, 경제지, 트위터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튤립 버블을 붕괴시킨 것은 아무것도 모르고 투기에 뛰어든 신규 투자자도 아니었으며, 튤립을 거래하던 사람들의 탐욕과 어리석음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부의 분배에 있어서의 거대한 변화와 여기에 기인하는 사회 문화적 변화에 대한 두려움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지난 수세기동안 튤립 버블은 투자자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경고, 모두가 열광할 때 다시 한발짝 떨어져 다시 생각해보라는 좋은 사례였다. 튤립 버블은 역사적 맥락에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실체가 무엇이든 비트코인은 절대 튤립 버블 2.0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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