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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권리 운동에 1차대전이 끼친 영향

category # 역 사 2018. 1. 29.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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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대전, 1916년 독일 군인들이 참호에서 기관총으로 적을 겨냥하고 있다.



세계 1차대전이 후대에 영향을 미친 가장 중요한 유산 중 하나는 세간에서 완전히 잊혀졌다바로 현대적인 동성애 권리 운동을 촉발시킨 것이었다.

 

1차세계 대전의 처참한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게이 군인들은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확신했다완전한 시민권을 인정받길 원한 것이다특히 이미 미미하게나마 동성애자의 권리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독일에서는 동성애자들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한 운동을 전개할 단체가 형성되었다.

 

19세기에 동성애 해방이라는 운동이 시작되었지만이런 운동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있는 현대적인 모양을 갖춘 것은 바로 1차대전 직후였다.

 

러시아에서의 죽음

 

1915년 겨울독일 군인이 러시아의 야전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이 군인은 다리에 폭탄 파편을 맞아 전우들에 의해 후방으로 간신히 후송되었다이곳에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몇 주간이나 치료를 받았다그러나 그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바로 외로움이었다그는 할 수 있는 틈틈이 남자친구에게 편지를 보냈다.

 

마지막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이제 더 이상 이곳에 없는 한 모금의 신선한 물을 간절하게 원해이제 읽을 것이 하나도 없어신문 좀 보내줘그러나 무엇보다답장 좀 빨리 부탁할게.”

 

주변 사람들에게 본인의 관계를 숨겨야만 했던그리고 그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던 200만에 달하는 독일 군인들 중 한명이 뿐이었다그의 고통은 다른 독일군들의 경험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았다그러나 그가 사랑했던그래서 그에게 외로움을 안겨주었던 남자친구는 조금 달랐으며엄청난 결과를 낳았다.

 

기록에는 단순하게 ‘S’로만 남아 있는 그의 남자친구는 독일군에 징집되 전선으로 나아간 그가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죽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 밖에 없었고, S는 이 이야기를 1916년 과학적 인도주의 위원회(Scientific Humanitarian Committee)에 서한으로 보내었다.

 

과학적 인도주의 위원회는 약 100여명의 회원을 자랑하는 그 당시 세계 최고의 동성애 해방 운동 그룹이었다이 군인의 이야기의 끝은 그리 좋지 못했다. S의 답장은 전쟁의 혼란 속에서 유실되었고 결국 남자친구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그는 제 연락을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S는 위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전했다.

 

시민권에 대한 요구

 


전쟁이 끝난 후많은 사람들은 이 수많은 죽음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S는 애인의 고통과 죽음에서 교훈을 발견했다.

 

그는 누릴 수 있었을지 모르는 밝은 미래를 조국에 바쳤습니다.” 그 조국에는 동성애를 금지하는 법률이 존재하고 있었다그러나 이 동성애 금지법안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S 그리고 그와 같은 사람들은 심지어 그들의 가족에게 조차 공개적으로 그들의 관계를 드러낼 수 조차 없었다 동성애는 직장에서의 해고사회적 관계의 단절협박의 위험 그리고 형사 고발을 의미했다.

 

S는 이를 훌륭한 시민이자조국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군인들이 사회적 멸시를 받으며 부랑자의 지위를 감수해야하는 안타까운 상황.” 이라며 이들은 “선천적으로 동성에 대한 성적지향성을 갖고 있지만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한다.” “이제는 이들이 국가에 보이는 충성심 만큼 국가도 이들을 대우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성애 운동의 새로운 장


인권연맹이 발행한 잡지. 1930년


많은 참전용사들이 S의 주장에 동조했다전쟁이 끝나자 이들은 이를 행동으로 옮겼다회원수가 10만여명에 이르는 인권 연맹(League for Human Rights)를 비롯한 여러 새로운 인권단체를 결성한 것이다게다가 동성애자들의 권리에 대한 수사도 바뀌었다전쟁 전의 동성애 해방 운동은 이들의 성적 지향이 과학적으로 자연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에 집중했다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S와 같이 시민의 의무라는 명분아래 국가를 위해 막대한 희생을 감수한 이들을 위해 정부 역시 이들의 성적 지향이 어떻던 간에 똑같이 대우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들은 과학적 논쟁은 뒤로 미뤄두었다그들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동성애자들의 권리에 대해 정부에 직접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했다동성애자들 또한 당당한 시민이며 이들의 권리 역시 보호받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이들의 주장은 단순히 동성애 금지법을 폐지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그 당시로서는 매우 과격해보이는 그리고 이러한 일이 실제로 시행되기 위해서 수십년이 세월이 필요로 했던동성애자들의 공무담임권을 보장해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존중 받는 시민

 

이러한 시민권에 대한 아이디어에 영감을 받은 운동가들은 역사학자들이 이른바 존경심이라 부르는 개념을 강조했다존경심은 행동하는 중산층으로서의 명예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었다. 20세기를 거치면서동성애자 권리 운동가들은 동성애자들이 명예롭게 그리고 공개적으로 군대와 같은 존경의 대상이 되는 직업군에서 봉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다성과 젠더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바꾸기 위해 투쟁했던 일부 급진주의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운동가들은 동성애자들이 평범하면서도 훌륭한 시민사회의 일원이라는 점을 강조했던 것이다.

 

1929년 인권 연맹(League of Human Rights)의 대변인은 우리는 동등한 권리를 요청하는 것이 아닙니다동등한 권리를 당당히 요구하는 것입니다!”라 주장했다아이러니컬하게도 세계 1차대전의 온갖 폭력과 끔찍한 인명피해가 20세기 초반 동성애자 권리 운동을 포함한 이런 인권운동에 큰 영향을 준 것이다.

 

이런 운동이 시작 된지 거의 벌써 1세기가 경과했다독일은 1차대전 후 14년간의 민주주의를 만끽했지만,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장악하고동성애 금지법을 이용하여 수천명의 사람들을 학살했다이 법은 명칭은 바뀌었지만 1990년대까지 유지되었으며미국 역시 동성애 금지법안을 겨우 2003년이 되어서야 폐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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