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오 지안화는 중국에서 가장 재산이 많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지난 20년 동안 중국 공산당의 정치 엘리트들과 연결된 사업을 통해서 엄청난 재산을 축적했는데 그 중에는 중국의 주석인 시진핑의 친척들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중국의 불투명 한 정치 문화 때문에 시아오의 납치 이유를 추측밖에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아오는 본인을 보호하기 위해 꽤 많은 조치를 취해왔다. 그는 모국인 중국 이외의 지역에서 거주하며 사업을 운영했을 뿐만 아니라 앤티가 바부다의 외교관 여권을 가지고 있으며, 캐나다의 시민권도 가지고 있기에 아마도 중국 정부의 위협에서 법적, 외교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홍콩은 자체 경찰, 국경 통제 및 이민 제도를 가지고 있으며, 이론적으로는 중국 본토의 공안 체계와는 별도로 작동한다. 그러나 베이징 당국이 홍콩에서 무언가를 하려고 했다면, 이와 같은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납치 이후, 홍콩 행정구는 어떠한 항의도 하지 않았고, 중국 역시 어떠한 설명도 내놓지 않았다.
이 사건은 중국이 홍콩에 완전한 자치권을 보장하고있다는 선전에 대한 중대한 반증사례이다. 불과 1년 전, 5명의 출판업자와 서적상이 중국 공안에 의해 은밀하게 체포되었다. 목적지도 모르는 채 끌려가 아직까지 억류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TV에서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도록 강요당했다고 한다. 시아오의 납치와 마찬가지로, 이 사건은 비밀리에 이루어지긴 했지만, 사람들은 이 사람들은 중국 정계 실력자의 부정부패에 관한 폭로성 기사를 책으로 출판하려 했다는 이유로 중국 공안의 목표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종류의 책은 특히 중국 본토인들에게 암암리에 꽤 많은 인기를 얻었는데, 중국 본토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절대 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책 중 어떤 것은 시진핑 주석의 사생활 특히, 여자관계에 대한 비밀을 폭로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이 납치 사건은 많은 홍콩 주민들에게 1997년 홍콩 반환 당시 영국과 중국간에 맺어진 조약이 단순한 종이 조각일 뿐이라는 점을 일깨워 주었다. 실제로, 시아오의 납치는 홍콩의 자치권이 매우 취약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지난 11월 홍콩 입법회 선거에서 선출된 2명의 후보에 대한 임명이 철회되었다. 어떤 언론에서도 이들 두 사람이 출구조사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기록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이들은 홍콩의 독립을 주장하는 청년신정 당 출신이었다. 임명이 거부된 이유는 취임식에서 중국에 대한 충성맹세를 거부하고, 홍콩 국(國)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으며, 중국 대신 주로 일본제국시기에 사용된 경멸적 호칭인 ‘지나(支那)’라 불렀다는 이유였다.
청년신정당 소속의 야우 와이칭. 같은 청년 신정당 소속 당선인 바지오 렁과 함께 취임 선서식에서 반 중국 퍼포먼스와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입법원 의원 임명을 거부당했다.
홍콩의 행정장관이자 친중파인 런춘잉은 먼저, 청년신정 당의 의석을 회수할 것을 홍콩 법원에 요청하였다. 하지만 홍콩 법원에서 임명 취소 대신 재 선서를 명령할 것으로 보이자 런춘잉 행정장관은 이를 다시 중국 전국인민대표회의 수석위원회에 이 문제를 위임하였다. 전인대가 홍콩기본법에 대한 최종해석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청년신정 당의 당선인 2명은 직위를 정식으로 박탈당했다.
홍콩이 반환된 이래로, 베이징은 홍콩의 내부 정치문제에 거의 관여하지 않아왔지만, 이 문제는 홍콩 주민들에게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깊은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분위기는 여전히 흉흉했다. 1월에는 20세의 홍콩의 가장 유명한 반 중국주의자인 조슈아 웡이 이끄는 민주화 운동 단체의 대표가 대만을 방문했다. 대표가 떠나기 전 홍콩 공항에서는 친중국 시위대가 격렬한 위협과 모욕을 가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시위대가 중국의 사주를 받은 어용시위로 추정했다. 이 시위대의 목적은 홍콩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끝은 좋지 못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내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이 이들의 목표였다면 꽤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이 홍콩에 준 메시지는 이 뿐만이 아니었다. 도시 전체를 휘감고 있는 불안한 예감은, 한때 아시아에서 가장 자유롭고 국제적인 도시였던 홍콩이 중국의 권위주의 정권에 점차 짓눌려가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는 것이었다. 홍콩을 오늘날의 위치까지 이끌었던 이런 자유롭고 민주적인 문화는 더 이상 유지되기 힘들 것이다. 한 유명한 변호사는 이제 홍콩에는 희망이 없다고 까지 표현했다.
홍콩과 중국 본토와의 관계가 항상 이랬던 것은 아니었다. 지난 1997년 홍콩반환이 실행될 때, 650만에 이르렀던 홍콩 주민들의 걱정은 부분적으로는 어떤 자부심에 의해 상쇄되었다. 비록 수천명의 주민들이 이민을 택하거나, 새로운 시대에 대한 일종의 보험으로 다른 국가의 여권을 얻으려 노력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본토가 경제적 성장을 계속해서 구가하면, 정치적 자유가 따라올 것이라 믿었다. 홍콩이 중국화 되기 보다는 중국의 홍콩화가 이루어질 것이라 믿은 것이다. 그리고 어쨌거나 이들은 원래 ‘중화민족’이었고, 홍콩의 반환은 밝은 미래의 시작이라 믿었다.
그리고 실제로 홍콩반환 협상도 나름 괜찮게 이루어졌다. 홍콩의 반환은 도시의 통제권을 중국에게 넘기는 것이 아니라 홍콩 주민들에게 돌려주는 형식을 띄었으며, ‘일국양제’로 알려진 중국과의 협약에 따라, 홍콩은 최소한의 간섭을 받으며 50년간 자치권을 보장받았다. (물론 이 때에도, 홍콩 주민들의 의견은 협상에서 전혀 반영되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긴 했다.)
홍콩은 중국의 경제 개발을 지휘하던 당국자들에게는 매우 귀중한 자산이었다. 중국 정부가 투자자들에 대한 쓸데없는 간섭을 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또 홍콩은 1980년대 초부터 시작된 경제 개발을 위한 대중국 자본투자에서 가장 큰 지분을 차지했다.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치면서 홍콩은 중국이 서구의 자본과 기술을 받아들이는 관문이 되었으며 홍콩의 공평한 법원, 투명한 금융 시장 및 장 언론과 같은 서구식 제도와 기관들은 홍콩을 글로벌 기업을 위한 훌륭한 배후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국제 비즈니스를 시작하기에 홍콩은 매우 이상적인 장소였으므로, 중국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외국 투자자들로부터 안정적으로 투자를 유치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홍콩의 주민들을 안심시켰던 또 다른 요소는 바로 ‘일국양제’ 시스템이었다. 많은 이들에게 이 시스템은 대만을 겨냥한 것으로 여겨졌다. 2300만명에 이르는 인구를 가진 자유 민주주의 국가인 대만을 다시 중국으로 편입시키는 것은 1949년 이래로 중국 정부의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였다. 만약 홍콩이 중국 주권 아래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며 번영할 수 있다면 대만의 국민들도 점차 비슷한 방식으로 중국 본토와의 통합에 대해 수용할 수 있게 되리라는 추측이었다.
‘일국양제’ 초기 시행 기간동안 이의 성공을 점치는 목소리가 높았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중국 외교 당국이 줄기차게 주장해왔던 ‘윈윈’ 전략에 가장 부합하는 사례처럼 보였다. 그리고 특히 대만을 고려해보면 꽤 가능성이 높았다. 중국과 홍콩, 대만. 이 3 사회 모두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홍콩의 옛 식민지 종주국이었던 영국은 중국에 대한 비판을 꺼리고 있는데, 중국과 비즈니스, 투자가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홍콩의 마지막 식민장관이었던 크리스 패튼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지금 민주화 운동가들 세대의 부모님을 실망시켰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자식 세대마저 져버린다면, 이는 굉장한 비극이 될 것입니다.”
홍콩의 현 상황이 얼마나 복잡한가에 대해 단순하게 이야기 하기는 어렵다. 또 중국 본토가 더 이상 홍콩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않고는 홍콩에서 일어나고 있는 위기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대일 수도 있다. 중국에 홍콩에 의존하지 않는 다는 것은 단순히 경제나 정치적인 분야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는 홍콩주민과 중국 본토인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심리학적 전환을 야기한다.
오늘날 중국 경제는, 홍콩 반환 시기와 비교해 11배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같은 기간, 홍콩의 경제는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더 높아지면서 정체되었다. 특히 계층이동이 점점 더 어려워지면서 많은 젊은이들이 미래에 대해 비관적으로 바뀌었다. 홍콩의 40세 미만 청년들은 대부분 부모와 함께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아지지 않을 것으로 예측했다. 은행과 금융 부분에 종사하는 소수의 인원들을 제외하고는 경제성장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으며, 특히 집값이 뛰면서 홍콩인들은 내 집을 가지기가 거의 불가능해졌다.
1997년 당시 홍콩인들의 소득은 중국 본토 주민의 35배에 이르렀다. 그리고 홍콩 방문을 허가 받은 소수 중국 본토 주민들은 집으로 돌아가서 최고급 쇼핑몰과 부유함, 홍콩의 국제적인 분위기에 대한 이야기를 퍼트렸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중국에서 추방당한 작가 마지안의 2008년 소설, 베이징 코마에서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소설은 중국 남부의 의대에 다니고 있는 홍콩 여성과 본토인 남성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홍콩 집에 다녀온 여성은 남성에게 말보로와 음악 카세트 테이프를 선물하였지만, 남자에게는 카세트 테이프가 없었고, 카메라도 선물했지만, 나중에 남자는 몇 년치 집 임대료를 내기 위해 이를 팔아버리고 만다. 여자의 부모님은 남자 집안과의 부의 격차 때문에 교제를 반대하고, 남자는 홍콩과 중국과의 국경에 있는 기차역에서 여자를 배웅하면서 다음과 같이 풍경을 설명한다. “기차역에 들어오는 홍콩 관광객들은 깔끔한 머리와 깔끔한 여행 가방을 들고 있었다. 이들의 모습은 일회용 가방을 어깨에 들쳐메고 맨발로 터벅터벅 기차역으로 들어오는 꾀죄죄한 몰골을 한 본토 여행객들과 같은 행성에 사는 존재로 보이지 않았다.”
오늘날 이런 홍콩과 본토인의 차이는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홍콩은 연간 수백만명의 본토 관광객이 찾는 유명 관광지가 되었고, 한때 중국인들이 선망하던 홍콩 달러는 이제 중국 위안에 비해 그리 높은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홍콩에 증가하는 중국인의 존재는, 홍콩 원주민들의 짜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중국 정치인들을 포함한 부유한 중국 본토인들이 홍콩의 값비싼 아파트와 주택을 사들이고 있으며, 그 덕분에 부동산 가격이 폭등해 정작 홍콩인들은 집을 얻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중국 본토 출신의 방문객들은 이들을 “전염병, 해충, 약탈자”와 같이 인종적으로 분리된 사회에서나 등장하는 언어로 비난하는 홍콩인들의 표적이 되며, 많은 홍콩 원주민들은 중국의 신흥 중산층의 예의 없고 무례한 거친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 이들은 공공장소에서 침을 뱉고, 무단횡단을 일삼으며, 어린아이들을 제 멋대로 활개치게 놔두는 등 홍콩인들에게 짜증을 유발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 본토인들에게 홍콩은 더 이상 경외의 대상이 아니다. 실제로 중국의 많은 도시들은 홍콩과 비슷하거나 심지어 더 번영해 보이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본토인들의 홍콩 관광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중국인들은 홍콩에 대해 매우 복잡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 중국인들은 홍콩사람들에 대해 진짜 중국사람처럼 생각하며 그리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70년대와 80년대 홍콩인들은 선전과 같은 지역에 막대한 투자를 했고, 재벌처럼 행동했다. 홍콩인들은 이들 지역에서 매춘부를 사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중국이 부자가 되었고, 노예가 되는 것은 홍콩 주민들의 차례이다. 중국인들은 홍콩에 방문하면서 마치 식민지에 온 것처럼 행동한다. 중국 정부가 뒤에 있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내키는 대로 행동한다.
어떤 경제 통계보다도 홍콩 주민들을 가장 불안하게 하는 것은 이러한 형태의 심리적 역할 전이이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는 시진핑 주석의 고압적인 태도 때문에 더 악화된다. 집권 4년동안 시진핑은 막대한 권력을 장악했다. 그의 통치아래서, 이제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중국의 시민사회는 끊임없는 탄압을 받았다. 인권문제를 다루는 변호사는 기소되었고, 대학들은 엄격한 이데올로기 가이드라인에 따르도록 관리 받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홍콩의 민주주의 운동은 서방의 중국 분열 책동으로 선전되었는데, 중국 당국의 설명에 따르면 그 목표는 중국을 전복하고, 본토의 자유주의를 자극하면서 중국의 사회적 안정을 깨뜨리기 위한다는 것이었다.
시진핑은 중국 해군을 증강하고 남중국해에서 인공 섬을 건설하며, 일대일로라는 대담한 전략을 추구하는 등 국제무대 특히 아시아에서 단호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대담한 외교적 행보는 중국에서 시진핑의 지지율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대만과 마찬가지로 홍콩에서도 두려움과 걱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아무도 중국이 10년안에 이토록 빨리 영향력을 확대할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했으며, 미국의 이토록 빠른 쇠퇴 역시 예측하지 못했다. 그러나 중국의 경제에 대해서는 매우 낙관적이지만, 정치분야에 대해서는 그러지 못한다.
2012년 홍콩 주민들은 중국 정부에 의해 조직적으로 자행된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탄압 덕분에 선출된, 그러나 홍콩 역사상 가장 인기가 없는 행정장관 런춘잉의 취임식을 지켜봐야했다. 중국 정부에 의해 신중하게 계획되고 연출된 취임식은 북경어로 진행되었는데, 이는 중국의 공식 언어이기는 하지만 홍콩인들의 일부만이 북경어를 유창하게 사용할 수 있다. (홍콩의 지배적인 언어는 광동어이며, 이는 홍콩의 지역적 정체성의 핵심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취임선서를 하는 동안 런춘잉은 심지어 “홍콩”이라는 단어조차 말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많은 비난이 일어났으며, 어떤 사람은 탄핵을 청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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