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저 공작과 공작부인이 1937년 10월 23일 뮌헨에서 히틀러를 만나서 인사를 나누고 있다.
영국의 왕실 특히 독일계 친척 중 일부가 히틀러의 열렬한 추종자였기에 이러한 두려움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오늘날까지 왕립 문서 보관소는 왕가와 독일계 친척들 사이에 오간 서신을 역사학자들에게 공개하지 않고있다. 그러나 고맙게도 연락의 흔적은 양쪽 모두에게 남아 있다. 독일의 다른 보관소에서는 왕비 메리와 그의 아들인 윈저 공작 조지 6세(에드워드) 그리고 독일계 사촌 사이에 있었던 접촉의 실체가 남아있다.
이 독일계 친척으로는 헤센(Hessen), 코부르크(Coburg), 하노버(Hanover), 발데크-피르몬트(Waldeck-Pyrmont) 그리고 독일의 황실이었던 호헨졸레른(Hohenzollern) 가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들 중 많은 이들이 히틀러에 빠져 있었다. 이 가문에게는 일종의 목표가 있었는데 히틀러가 부여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목표는 영국과 독일이 동맹을 맺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독일 귀족들이 나치에 얼마나 쓸모가 있을지를 일찍부터 발견하였다. 히틀러 개인적으로는 귀족들을 “퇴화한 놈들”이라 비웃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옛 이름의 영광은 아직 독일에서 힘을 가지고 있었고, 귀족들의 지지 덕분에 히틀러는 보수주의자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이 히틀러에게 정권을 쥐어 준 후에도, 히틀러는 여전히 국제적인 활동을 위해 독일 귀족들을 이용하였다. 그 중에서도 핵심은 영국의 기득권층 그 중에서도 영국의 귀족 그리고 왕실과의 접촉이었다.
1933년 히틀러에겐 국제무대에서의 연줄이 없었고, 그의 외무부장관조차 신뢰하지 못했다. 그래서 히틀러는 독일의 귀족들을 영국에 대한 비밀 공작에 활용하였다.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이자 헤센가의 일원이었던 코부르크 공작은 영국과의 친밀한 연결책으로 활동했다. 코부르크 공작은 여동생 앨리스의 시골집에서 훗날 외무장관이 되는 Ribbentrop과 함께 영국의 정치인들과 만났다.
Carl Eduard Coburg
에드워드가 미국출신의 이혼여성과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포기했을 때, 나치 역시 심한 타격을 입었다. 그래도 나치는 여전히 에드워드를 계승한 조지 6세의 궁정에도 계속 연줄을 가지고 있었다.
선전장관 조세프 괴벨츠는 에드워드의 퇴임 소동 시기동안 영국 왕가에 대한 비난을 하지 않도록 독일 언론을 단속하였다. 그리고 영국과 영국의 왕실 역시 이에 대해 고맙게 생각했다. 독일 외교관은 조지 6세가 “독일 언론의 태도를 잊지 않을 것이라며, 제 3제국에 호의를 보이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코부르크 공작은 조지 6세와 그의 왕비 엘리자베스를 후원하였다. 그의 일기에는 영국 국왕부부를 “버티와 엘리자베스”라며 친근하게 적혀 있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1933년에는 엘리자베스가 코부르크 공작과 함께 샌드링햄의 궁정 정원을 산책하기도 하였다. 엘리자베스는 코부르크가 열렬한 나치 추종자라는 사실을 전혀 우려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더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코부르크 공작은 1920년대 독일에서 우익 테러리스트 조직을 지원하고 히틀러가 권력을 획득할 수 있도록 후원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에드워드 왕세자 역시 나치의 타겟이었다. 독일 정부는 1937년 에드워드의 독일 방문의 비용을 지불했다.
이 방문은 에드워드가 나치 경례를 하고 히틀러를 비롯한 모든 주요 나치 지도부를 만나는 등 성공적인 선전 여행으로 바뀌었다. 코부르크는 에드워드를 만난 고위급 나치 인사에 포함되어 있었다. 몇 주 후 그는 다시 영국의 왕비 메리와 차를 마셨고, 이러한 고위급 영국 왕실인사와의 연줄은 1939년 수데텐 위기 당시 특히 유용하게 쓰여졌다.
히틀러는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합병 한 후 체코슬로바키아를 박살내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이 위기에서 코부르크 공작은 영국으로 파견되어서 “버티와 엘리자베스”랑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은 성공적이었고 히틀러는 수데텐란트를 합병하였다.
조지 6세가 반-소련 주의에 입각하여 체임벌린의 유화정책을 지지하였으며, 결국 히틀러와 합의가 이루어졌을 때 기뻐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한다. 메리 왕비 역시 조지 6세를 전적으로 지지했으며, 1938년 9월 체결된 뮌헨 협정에 대한 비판에 대해 분노를 표하기도 했다.
히틀러에게 약한 모습을 보인 것은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반년 후,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무력으로 합병하였다. 그러나 그때조차도 왕가는 친 나치 태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1939년 늦 여름까지, 조지 6세의 형제인 켄트 공작은 친척인 헤센 가를 비선으로 활용하여 전쟁을 막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버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었다. 히틀러가 1939년 8월 스탈린과 협정을 맺고 한달이 지나기도 전에 폴란드에 대한 침공을 개시했을 때라도, 왕족의 유화주의자들은 히틀러에게 놀아났다는 것을 깨달았어야했다. 그리고 75년동안 왕족의 나치에 대한 친근한 태도가 세상에 드러나지 않길 기도하는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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