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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최후항전, 마사다 요새의 진실은?

category # 역 사 2017. 3. 12.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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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년 혹은 74년 남성과 여성 그리고 아이들을 포함하는 유대인 열심당원들은 험한 이스라엘의 사해 근처 바위산 정상에 구축된 요새 마사다에서 집단 자살을 하였다. 로마에게 항복하여 노예가 되느니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이는 로마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해 전해진 이 이야기는 고대시대부터 전해진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 신화와 같은 일이 진짜 일어났던 일인가?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의 저명한 이스라엘 고고학자 Yigael Yadin은 마사다 유적을 1960년대에 발굴하는데 성공했다. 더불어 다수의 유물도 발견하였다. 그리고 이 발굴에 대하여 책을 출판하였다.


 

1950년대의 하솔(Tel Hazor) 1960년대 마사다에서와 같이 이스라엘 유적에 대한 Yadin의 발굴 작업은 부분적으로 성경 내용과 다른 유명한 사건들을 연결함으로써 이스라엘 땅에 대한 유대인의 소유권 주장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어떤 이들은 마사다를 비롯한 레반트(Levant) 지역에 걸친 Yadin의 고고학적 발견이 정치적 목적 때문에 진실을 왜곡했다고 의심하기도 했다. 1995년과 2002년에 예루살렘의 히브리 대학의 사회학자인 Nachman Ben-Yehuda는 마사다의 발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담은 책을 출판하였다. (마사다, 신화와 진실의 희생) 이 책에서 그는 Yadin이 신생 국가인 이스라엘이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도록 민족주의적 서사를 만들기 위해 어쩌면 진실을 고의적으로 왜곡했다고 결론 내렸다.

 


이후 예루살렘의 히브리 대학의 교수이자 Yigael Yadin과 함께 마사다를 발굴했던 Amnon Ben-TorYadin과 마사다 발굴의 의의를 지지하는 책을 출간하였다. (back to masada, 2009) 이 책에서, Ben-Tor는 마사다 발굴과정을 복기한 후 Ben-Yehuda의 주장을 반박하고 Yadin의 견해를 재확인 했다.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마사다는 단순한 고고학적 발굴 작업 그 이상의 이야기이다. 고고학자들이 역사적 사료들을 이용하여 발굴 과정에서 발견한 것을 보완하였고, 고고학적 발굴에 살을 붙여 나갔다. Yadin은 특히 로마의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저서를 많이 참고하였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로마로 전향한 유대인 장군이자 역사가였는데, 기원후 1세기 경에 유대인에 관한 2권의 책을 저술하였으며, 이는 거의 2000여년 전에 마사다에서 일어났던 일을 재 구성하는데 가장 중요한 1차 사료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마사다는 고고학과 역사적 기록의 관계가 어떻게 역사를 재 구성하는지 좋은 사례를 보여주었다. 요세푸스의 저서가 100% 정확하다는 것을 알 수 없으니 고고학을 통하여 고대의 문헌을 검증해 볼 수 있다.


 

마사다는 또한 고고학적 발견이 일각의 학자들이 Yaldin이 그러했다고 주장하듯이 민족주의를 자극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에 대한 타산지석의 사례를 제공한다. 마사다에 대한 논란은 요세푸스의 기록에 대한 신뢰성과 이스라엘의 고고학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Yaldin에 대한 신뢰성 그리고 고고학적 발견에 대한 민족주의의 영향에 대한 신뢰성을 포함한다. 우리는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우리는 이 비극적인 그리고 가슴 아픈 고대 유적과 이 유적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수천년 전에 일어난 일을 다시 불러일으켜 오늘 날 사람들의 권리와 한 나라의 법적 토대를 구성하는데 사용할 수 있을까?

 

마사다는 주변의 건조하고 메마른 사막으로 둘러싸인 대략 450m 높이의 산 위에 있는 남북 길이 600미터 너비 250미터, 평균 120미터인 평평한 고원에 건설되었다. 1960년대 중반 Yadin의 발견 이후 관광명소가 되었는데, 1년에 50만명에 이르는 관광객이 산꼭대기의 이 폐허를 보기위해 방문한다. 현재 예루살렘 다음으로 이스라엘에서 두 번째로 인기있는 관광지이며, 2001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마사다는 사해의 남쪽 끝, 사해문서가 발견된 쿰란의 동굴에서 먼 남쪽에 위치한다. 요새가 있던 산 400m 정상은 뱀의 길로 알려진 좁은 등반로를 통해서만 도보로 접근할 수 있다. 뱀의 길은 산의 정면에서부터 이어져 있으며, 측면에는 로마군이 요새를 공격할 때 축조하였던 토산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낮이 되면 이 지역은 굉장히 뜨겁게 달아오르기때문에, 관광객들은 930분이전에 도착해야 도보로 마사다에 오를 수 있다. 이 시간이 지나면, 등산하는 동안 탈수증상에 빠질 위험이 높기 때문이다. 새벽 일찍부터 등반을 시작하면 아름다운 일출을 보면서 그 보상을 받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그 보다 뱀의 길을 따라 설치된 케이블카를 타고 마사다에 방문하는 것을 선호한다.



 

Yadin의 발굴 작업은 2차례에 걸쳐서 진행되었는데, 첫 번째는 1963 10월부터 1964 5월까지 진행되었으며, 2차 시기는 1964 11월부터 1965 4월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이 발굴 작업은 여러가지 의미로 고고학계에서 중요한 이정표를 남겼다. 예를 들어 Yadin은 유적을 발굴하기 위해 국제 자원봉사단의 도움을 받은 고고학자였다. 그는 이스라엘과 영국의 신문에 자원봉사자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게재하였고, 결국 총 28개국의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발굴에 참여한 인원들 숫자 그 자체만으로도 기록적이었다. Yadin은 발굴기간 내내 최소 300여명 이상의 인원이 동시에 투입되었다고 보고하였다. 그 중에는 이스라엘 국방군과 고등학생 및 키부츠 구성원들 그리고 국제 자원봉사단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발굴에 필요한 자재들을 운반하는 것도 엄청난 일이었다. 오늘날의 고고학자들은 아마도 헬리콥터를 이용해서 자재를 나를 수 있겠지만, 그 당시에는 모든 자재들을 로마군이 마사다 공성에 사용했던 언덕길을 따라 옮기는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발굴대원들은 당시 로마인들이 천막을 설치했던 장소에 똑같이 텐트를 치고 지내야만 했다.

 

그리고 이 발굴 작업 자체 역시 전설이 되었다. Yadin은 발굴 계획을 세울 당시만 하더라도, 산 정상에는 어떤 구조물의 형태도 확인하기 어려웠다고 기록했다. 그가 말하길, 이 산 정상이 돌과 잔해들로 뒤덮여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 실제로 발굴팀이 공중 사진을 찍어본 후 겨우 어디서 어떻게 발굴을 시작할 수 있을지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발굴 작업이 끝나갈 때가 되어서, 발굴팀은 마사다가 헤롯데왕이 기원전 40년에 성공적으로 로마에 방문하고 난 후, 예루살렘을 떠나 도피해야 할 일에 대비하여 건설한 정교한 왕궁 및 정착지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로부터 70년이 지난 후, 1차 유대반란 기간 중 로마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킨 유대인 열심당원(Sicarri 혹은 Zealot)이 점거하여 거점으로 활용하였다.

 

실제로 마사다는 2개의 위대한 궁궐을 자랑했는데, 하나는 고원 북쪽 끝에 있었다. 절벽 쪽에 3층으로 구성된 이 궁궐은 유대 사막의 강렬한 열기 속에서 여름 산들 바람을 맞이했다. 다른 궁궐은 마사다의 서쪽 부분에 위치하였다. 두 개의 궁전 외에도 Yadin의 발굴 팀은 가죽공업장, 작업소 그리고 유대교 회당으로 사용되는 객실과 건물들을 발견했다. 또 식량을 보관하는 엄청나게 많은 수의 창고도 발견했는데, 이들 중 일부에서 탄화 된 곡물을 담은 병이 발견되었다. 마사다에는 주변 지역은 신선한 물을 구할 수 없는 사막으로 둘러싸여 있기에, 빗물을 저장할 수 있는 물탱크도 존재했다.


 


벽의 일부는 짙은 파랑과, 화려한 빨강, 노랑 그리고 검은색으로 칠해진 회반죽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또 바닥은 일반적으로 그리스 혹은 로마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정교한 모자이크 장식이 있었다. 아마 헤롯데 왕이 로마에서 접했던 것들을 모방하기 위해 장인들을 고용했던 것 같다고 한다.

 

Yadin은 무너진 폐허 사이에서 원래 건물의 일부를 복원하였다. 마사다의 가장 훌륭한 복원 사례는 북동부에 잇는 거대한 저장실일 것이다. 여기에서는 벽의 아래쪽 부분만 남아있었지만, 벽의 위쪽 부분이 무너진 채 땅에 흩어져 있었다. Yadin과 발굴 팀은 가능한 모든 돌을 사용하여 벽을 재건하였다. 벽의 높이는 3.3에 달했다. 발굴팀은 이 벽을 복원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발굴했던 하단 부분과 복원한 상단부분을 구분해주는 검은색 선을 그려 놓았다.

 

Yadin은 마사다 정상의 흙 알갱이 하나까지 일일이 조사했다고 한다. 발굴팀은 거의 42,000제곱미터에 달하는 흙을 특별한 거름 체를 이용하여 조사했다. 그 결과 발굴팀은 수백 개의 동전, 문자가 새겨진 도자기 조각, 반지와 구슬 같은 보석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렇게 세세하게 조사하지 않았다면 놓칠 수도 있었던 유물들이었다. 이 중 동전 덕분에 Yadin은 그 동안 정확하게 확정하지 못했던 날짜를 알아 낼 수 있었다. 특히 이 동전들은 제 1차 유대 반란 기간 중 제조된 것이었다.

 

1차 유대반란은 기원후 66년 유대인들이 오늘날 이스라엘 땅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인들에게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이 반란은 로마가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원래 솔로몬 왕 시절에 건축되고 신 바빌로니아 시대에 파괴되었으며 다시 헤로데 왕에 의해서 재 건축되었던 사원들을 포함하여 모든 것들을 불태워버리고 나서야 끝나게 되었다. 각각 솔로몬 왕과 헤로데 왕에 의해 건축된 이 사원들이 모두 같은 날에 파괴되었다 간주하고 이스라엘에서는 이 날을 공휴일로 지정하여 기억하고 있다. (티샤 바브, Tisha B’Av)

 

반란이 끝나자, 반란군 중 일부는 간신히 예루살렘의 폐허에서 탈출하여, 마사다에 정창했다. Eleazar Ben Yair라는 지도자가 이끄는 이들은 유대교 열심당원(Sicarii)이었다. 이들은 헤롯데 왕이 마지막 피난처로 건설했던 마사다의 건물과 궁전을 점거하고 다시 요새화 하였다.

 

마사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기록한 요세푸스의 글에는 오류가 발견되었기에 역사학자들은 아마도 그가 다른 누군가의 글을 참고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요세푸스는 헤로데 왕이 산의 서쪽에 궁전을 지었지만 북쪽 방향으로 확장되었다고 서술하였지만, 고고학자들이 발굴해낸 것에 따르면 궁전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고 각각 마사다의 서쪽과 북쪽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요세푸스가 기록한 다른 세부 사항은 꽤 정확하다. 예를들어 그는 마사다의 목욕탕과 건물의 바닥이 여러가지 색의 돌로 포장되어 있으며, 물탱크로 사용하기 위해 암석을 파냈다고 기록하였다. Yadin은 바닥에서 부분적으로 손상되지 않은 모자이크를 발견했고, 요세푸스가 말한 물탱크가 실제로 존재하며 그 규모 역시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각각의 물탱크는 40만리터의 물을 저장할 수 있으며, 다합치면 총 400만리터의 물을 저장할 수 있었을 것을 추정된다.



로마가 반란군들을 토벌하기로 결정하기 전까지, 유대인 반란군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주변마을들을 3년간 약탈하였다.

 

요세푸스는 장군 플라비우스 실바가 이끄는 로마군이 마사다를 포위하고, 마사다 주변 사막지대를 둘러싼 요새를 건설하여 아무도 탈출할 수 없도록 감시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 플라비우스의 요새 중 8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마사다 정상에서 관측할 수 있다.

 

다음으로, 로마군은 산등성이를 따라 흙과 바위로 마사다 정상에 이르는 경사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경사로가 완성되자, 로마군은 돌을 발사하는 거대한 투석기와, 대형 활을 발사하는 발리스타를 올려 마사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거기에…. 철판으로 덧댄 60 큐빗 높이의 타워가 있었다. 로마인들이 공성기로 화살과 바위들을 마구 쏘아대자 성벽 안에서 농성하던 자들이 물러나 감히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오늘날, ABC방송이 1981년 마사다에 관한 미니시리즈를 위해 제작한 공성기를 유적지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Yadin과 다른 고고학자들은 발굴과정에서 마사다 공성전에 관련된 유물들도 발견했는데, 로마군이 투석기로 발사한 돌, 유대인 반란군이 던진 투석과 같은 것들 역시 마사다 유적지에서 전시하고있다.


 

로마군의 공성무기들이 자리를 잡고 나자 진짜 공성전이 시작되었다 플라비우스 실바 장군은 경사로를 따라 공성추를 끌어 올려 마사다의 성벽 앞에 설치하였고, 수많은 로마 병사들이 계속해서 공성추로 마사다를 공격하고 공격하고 또 공격했다. 벽에 금이 갈때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사다의 유대인 반란군들은 무너진 벽 뒤에 거대한 나무로 틀을 만들고 흙을 채워 넣어 새로운 성벽을 만들었다. 이 제 2성벽은 돌로 만든 성벽 뒤에 위치하여 공성추와 투석기의 충격을 흡수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 때문에 로마군이 마사다의 성벽을 무너뜨리는데 예상보다 더 많은 시일이 소요되었다. 외각의 성벽에 구멍을 내는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흙과 나무로 만든 제 2성벽이 여전히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군은 불화살과 횃불을 던져 마사다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불길이 잦아들고 밤이 다가오자 로마군은 철수하여 다음날 마사다로 진입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한편 로마군이 잠시 물러난 후 마사다에서 농성하던 유대인 반란군들은 선택을 해야했다. 로마군에게 죽거나 혹은 사로잡혀 노예가 될 것인가, 혹은 스스로 죽음을 택할 것인가. 요세푸스가 기록한 바에 따르면, 반란군 지도자 Eleazar는 남아있던 남성들에게 본인의 가족과 자녀들을 죽이기를 부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우리에겐 아직도 자유의 상태에서 용감하게 죽음을 택할 힘이 남아있습니다. 예기치 않게 정복당한 다른 이들은 그러지 못했던 권리입니다.”

 

가족들을 죽이고 돌아온 남성들은 추첨을 통해 10명을 뽑아 이들이 나머지 남성들을 모두 죽이게 하였다. 10명의 남성들은 다시 추첨을 통해 1명을 뽑아 나머지 9명을 죽이게 했고. 1명은 자살을 했다. 이 사람은 마사다에서 자살을 한 유일한 사람이었는데, 자살은 유대교 율법에 따르면 하지 말아야하는 죄에 해당한다. 어쨌거나, 이는 대규모 집단 자살이었으며, 다음날 아침이 밝아 로마군이 마사다에 진입했을 땐, 무거운 적막만이 이들을 반겼다. 구덩이에 숨어있던 2명의 여자와 5명의 아이들을 발견하고서야 로마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진실을 알게 되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이 날 밤 총 960명이 죽었다고 한다.

 

이 극적인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Yadin의 발굴작업이 끝난 후부터, 이스라엘군은 신병훈련의 마지막 행사를 이 곳 마사다의 정상에서 치루고있다. 한 밤에 모닥불 앞에서 다시는 절대, 절대 이 곳이 함락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맹세를 하며 일종의 종교적 의식을 하는 것이다.


MASADA ISRAEL ARMY CEREMONY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요세푸스가 전하는 이 이야기에 문제점은, 그날의 참사에서 피해 숨어있던 여성과 아이들이 물탱크로 사용되던 구덩이에 숨어서 Eleazar의 연설을 듣고, 이를 정확하게 로마군에게 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요세푸스도 이 이야기를 인용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만약 로마군이 벽에 구멍을 내는데 성공했다면 아무리 밤이 다가왔더라도, 절대 철수하여 캠프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당시 로마의 군사 교리에 만약 어떤 조그마한 전술적 이점을 확보한다면, 밤낮 혹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이를 확대할 것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로마군이 벽에 진입로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면 로마군은 적에게 틈을 주지 않고 밀어 붙였을 것이고, 유대인들이 Eleazar의 연설을 듣고, 가족들을 죽이고 돌아와 제비뽑기를 하며, 최후의 1인을 정할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요세푸스가 묘사하는 일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일어난 일은 일반적인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로마군이 벽을 뚫고 난 후, 쉴 틈을 주지않고 밀고 들어가 유대인 반란군들을 쓸어버렸을 것이다. 이는 집단 자살이 아니라 집단 학살이었다. 요세푸스는 나중에 로마로 돌아가서 당시 지휘관들의 기록과 일기를 참고하여 글을 썼는데, 아마도 요세푸스는 이 이야기를 꾸며내도록 요청 받았을 것이다. 사실 가족을 죽인 남자들, 다른 남자들을 죽이는 남자들, 그리고 자살을 한 최후의 한 남자의 이야기는 요세푸스 본인의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기원 후 67, 유대 반란의 초기였던 마사다의 함락 몇 년 전 요세푸스는 요타파타라는 지역에서 로마군과 싸우던 유대인 장군이었다. 요세푸스는 47일동안 로마군을 막아서는데 성공했지만, 결국 패배하여 동료 40여명과 한 동굴에서 숨어 지냈다. 그들은 동굴에서 서로 죽여 주기로 결정했지만, 요세푸스와 다른 동료 한명만이 로마에 항복하고 살아남았다. 요세푸스가 마사다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기록한 것은 아마 이 일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여성과 아이들이 물탱크에 숨어 있었다는 이야기는 Yadin이 마사다를 발굴하기로 결심한 주요 이유이기도 했다.

 

Yadin의 발굴은 분명한 결과가 있지만, 이에 대한 그의 해석은 여전히 큰 논쟁 거리이다. 예를 들어, Yadin이 마사다에서 발견한 유물 중에는 벨트 버클, 문 열쇠, 화살촉, 숟ㄷ가라, 반지 및 많은 도자기와 수많은 동전 외에도 철로 만든 기타 물건들이 있었다. 발굴팀은 이를 마사다 유대인 반란군의 유품이라 설명했지만, 실제로는 유대인의 것일 수도, 로마군의 것일 수도 혹은 나중에 마사다에 거주했던 주민들이나 불법 거주자의 것일 수도 있다.

 

Yadin은 시편 81편에서 85편까지 그리고 150편을 적어 놓은 두루마기 문서를 발견했다. 하지만, 성경이 아닌 다른 중요한 문서들도 찾았다. 그 중에는 Yadin이 이끄는 발굴팀과 다른 고고학자들이 쿰란의 동굴에서 발견한 사해문서와 동일한 내용이 적힌 문서들이 발견된 것이다. 따라서 쿰란의 주민들과 마사다의 반란군들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 상태다.

 

아마도 Yadin이 마사다에서 발견한 것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시체들이었다. 30구 미만의 시체(요세푸스가 기록한 960여명의 시체에는 턱없이 모자란 수이다.)가 발견되었는데 일부는 머리카락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가죽 샌들이 근처에 있었다. 이 시체들이 최근에 가장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킨 것 들이다. 이 시체 중 25구는 마사다 남쪽 절벽 방향에 있는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이 시체들은 Yadin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69년 이스라엘에서 국장으로 장례가 치뤄졌다. Yadin은 이 시체들이 마사다의 반란군의 것인지, 로마군의 것인지를 확신할 수 없으며, 혹은 전혀 다른 시대에 살았던 사람일 수도 있다는 이유로 국장을 반대했었다.

 

나머지 3구의 유골은 마사다 북쪽부분에 위치한 궁전의 작은 목욕탕 테라스에서 발견되었다. 하솔(Hazor) 발굴의 책임자이자 이 유골을 발견한 Ben-Tor 교수는 책에서, 발견 당시의 모습을 이렇게 서술하였다. “발굴의 베테랑들과 우리들 중 냉소적인 사람들 조차 이 유골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굳어 멍하니 바라만 보고있었다.”

 

이 유골 중 하나는 대략 20세 전후의 남성으로 추정되는데 아마도 마사다의 지휘관 중 한 명 이었을 것이다. 그의 옆에는 갑옷과, 화살, 조각된 도자기 그리고 기도용 목도리 일부가 발견되었다. 근처 석고 바닥에서는 젊은 여성의 해골이 있었는데, 그녀의 머리카락은 발견될 당시에도 여전히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다. 3번째 유골은 어린 아이였다.

 

Yadin은 이 3구의 유골이 한 가족이라고 믿었다. 유골들과 함께 도자기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그 위에 잉크로 Ben Ya’ir라고 적혀 이었다. 이는 수년에 걸쳐서 많은 논쟁의 중심이 되었는데, Yadin에게는 이 유골들과 도자기 조각은 Eleazr ben Ya’ir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결정적인 단서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Yadin에게는 불행하게도, 최근의 법의학 분석에 따르면 이 유골의 주인들의 나이는 그리 크게 차이 나지 않아 아마도 가족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자는 22세쯤, 여자는 18세 그리고 아이는 겨우 11살정도의 소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10개가 아닌 11개의 도자기 조각이 발견되었다는 점과 더불어 매장된 유골들 일부에서 돼지뼈가 함께 발견되었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유대인의 관습상 이는 그 유골이 유대인의 것이 아니라는 강력한 증거인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Ben-Yehuda의 책에서 Yadin이 의도적으로 신화를 조작했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로 사용되었으며, Ben-Tor도 이에 대하여 반박했다.

 

Yadin에 대한 Ben-Yehuda의 견해를 지지하던 Ben-Tor의 견해를 지지하던 상관없이 Ben-Tor는 그의 책에서 여전히 Yadin이 옳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한편으로는 마사다를 과학적 의제로 올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마사다를 관광지로서 대중들의 의식안으로 끌어 넣었다는 것은 모두 Yadin의 모습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표현이다. 그는 학자이면서 공인이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마사다에서의 Yadin의 발굴작업은 이스라엘의 고고학, 특히 다국적 자원 봉사자 및 기타 여러가지 물류 운영 측면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오늘날에는 관광지로 더 유명하지만, 여전히 고고학자 특히 민족주의자들이 발견해낸 것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의 중심에 서있다.

 

고고학과 민족주의의 이런 연관성은 Yadin이나 이스라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유럽의 민족주의와 고고학에 관한 최근에 출판된 책은 독일, 이탈리아, 덴마크 등에서 고고학을 과학의 위치로 끌어올려 제도화하고, 박물관의 출현으로 완성된 것은 민족주의의 출현이라고 지적하고있다.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민족주의나 다른 유사한 감정에 의해 부당하게 영향을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해서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항상 그러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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