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스턴 처칠은 영국의 수상이자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인 중 한명이었다. 그리고 그가 몰두했던 것은 ‘어떻게 하면 대영제국을 구할 수 있을까?“였다. 그리고 전후 세계질서가 어떻게 형성될지에 대해서 신경을 곤두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전시총리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처칠은 좀 덜 실용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다른 별에도 생명체가 있을까?“
“수 십 만개의 성운들이 각각 수 천 만개의 태양을 거느리고 있는데,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환경을 가진 행성이 있을 가능성은 엄청나게 높을 것이다.” 이것이 처칠의 결론이었다. 그는 이 에세이를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바로 전날 탈고했다.
바로 작년까지만 해도 외계인의 존재에 대한 처칠의 생각은 역사가들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11페이지 분량의 처칠의 에세이가 출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50년대에 처칠이 그의 원고를 출판인 Emery Reves의 해변에 있는 별장에서 교정을 하였지만, 외부에 공개하지는 않았다. Emery의 아내 Wendy가 1980년대 미국 National Churchill Museum에 이를 넘길 때까지 이 원고는 그대로 Emery의 서재에서 잠자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작년, 박물관의 새 관장인 Timothy Riley가 박물관의 자료실에서 이 에세이를 발견하였다. 천체물리학자인 Mario Livio가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Riley가 이 에세이 원고를 Livio에 맡겼고, 이에 대하여 Livio가 Nature지에 논문을 제출하게 된 것이다. Riley는 천체물리학자의 관점을 듣고 싶었고 그래서 Livio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Nature지에 쓴 글에서 Riley는 “이 에세이를 검토한 최초의 과학자가 되어 매우 흥분됩니다.”라고 하였다.
Livio의 말에 따르면 처칠은 집에서 혼자 작업했다고 한다. 비록 과학자들이 거치는 동료평가(Peer Review)를 받지는 않았지만, 처칠은 친구이자 공식 과학자문이었던 물리학자 Frederick Lindemann을 포함하여 충분히 많은 정상급 과학자들과 당대 주요 이론과 아이디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Livio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물론 처칠이 이 분야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는 것에 놀랐지만, 가장 인상이 깊었던 부분은 그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처칠은 이 문제에 대해 오늘날 과학자들과 유사한 접근방식을 보였습니다. ‘다른 별에도 생명체가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처칠은 생명체가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단계로 나아갔죠. ‘좋아, 그럼 생명체엔 뭐가 필요하지? 생명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수적일까?’”
처칠은 이 필수적인 조건으로 액체상태의 물을 지목했다. 비록 물이 아닌 다른 종류의 액체를 기반으로 하는 다른 종류의 생명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 인정했지만, “현재의 인류의 지식으로는 그런 가정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Livio는 “정확히 오늘날 과학자들이 하고 있는 방식입니다. 물의 존재여부에 따라 생명체를 찾는 것이죠. 하지만 처칠은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물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오늘날 과학자들이 ‘거주가능 지역‘이라 부르는 것을 발견한 것이죠.”
태양계 넘어 시야를 넓히면서 처칠은 외계 생명체의 가능성을 매우 높게 점쳤다. “태양은 우리은하계의 수 천 만개의 항성 중 하나일 뿐이다.” 당시 저명한 물리학자이자 천문학자인 James Jeans의 이론인 ‘항성 주위에 행성이 자리 잡는 것은 그리 흔한 현상은 아니다‘를 인정하기는 했으나, 처칠은 만약 이 가설이 틀렸다면? 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이 이론은 반증되었다.)
처칠은 항성 주위에 ‘물과 대기가 존재할 수 있는 적당한 크기를 가진 행성’이 위치할 수 있다는 가정을 하며, 그 행성 중 일부는 항성으로부터 적당히 떨어져있어, 알맞은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는 행성이 존재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처칠은 심지어, 어느 멀지 않은 미래에 화성이나 달에 직접 방문하여 생명체의 존재 여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란 예측도 하였다.
그런데 왜 처칠이 애초에 외계 생명체의 존재에 대한 장문에 에세이를 집필하였을까? 그것도 대영제국과 자유세계의 미래가 백두간척에 서있던 세계대전 바로 전날에, 그리고 처칠은 영국의 수상으로의 취임이 거의 확정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처칠의 이런 집필 활동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수필은 처칠이 가지고 있던 과학적 호기심의 발현이기도 하지만 원고료가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처칠과 그의 가족들의 호화로운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처칠은 글을 쓰면서 많은 원고료를 받았다. (특히 1953년 노벨 문학상을 받으면서 17,529 크로네, 오늘날의 가치로 27만달러에 이르는 상금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처칠이 단순히 원고료를 위해 이 수필을 썼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처칠은 과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광범위한 주제를 섭렵했다. 처칠이 재무장관을 역임하던 시기, 양자물리학에 관한 책을 선물 받은 적이 있다. 그런데 나중에 처칠은 이에 대해, 영국 국고의 재정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 보다 책을 읽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처칠은 단순히 과학서적을 읽는데 그치지 않고, 과학에 대한 글을 쓰기도 했다. 1924년 한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처칠은 원자폭탄의 위력을 예견하였다. “오렌지 정도 크기의 폭탄이 한 블록, 아니 도시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 위력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1932년에는 시험관 고기의 등장도 예상했다. “50년쯤 뒤에는, 적당한 크기로 분리해서 배양함으로서 닭 가슴이나 날개를 먹기 위해 닭을 기르는 부조리를 끝낼 수 있을 것이다.
1939년에 처칠은 3개의 에세이를 썼는데, 앞서 소개한 외계생명체에 관한 글 이외에도, 지구에서 생명체의 진화,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인체에 관한 생물학 글을 집필하였다. 이중 생명체의 진화와 생물학 글은 1942년 공개되었는데, 외계생명체에 관한 글은 왜 공개가 되지 않았는지는 아직까지 미스테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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