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11월 3일 11시, 군중들이 빅밴을 바라보고있다. 이 시각 영국은 2차대전에 돌입하였다.
2차대전이 터진 날 영국에서 일어난 가장 이상한 일은 애완동물들을 학살한 것이다. 9월 8일 the Times는 지난 2주간에 걸쳐 수백만 마리의 동물들을 폐사시켰다고 보도하였다. 런던지역에서만 첫 4일동안 40만마리의 고양이와 개가 죽었다.
시체들을 처리하는 것도 문제였다. 등화관제때문에 RSPCA(Royal Society for the Prevention of Cruelty to Animal, 동물학대방지를 위한 왕립협회)에서는 밤동안 소각로를 중지시켜야 했기에, 모든 사체들이 화장되지 못하고 수도 동쪽 근교의 구덩이에 파뭍혀야했다.
이러한 도살은 대재앙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덨다. 전쟁은 런던에 공습을 통해 인화성 폭발물질들과 가스가 떨어지면서 시작될 것이었다. 주데테란트 영토 분쟁기간중에 대부분의 영국 남성 성인들은 방독면을 지급받았다. 그러나 애완동물들에겐 이런 준비가 없었다. 최악의 상황을 앉아서 기다리는 것보다 안식을 주는 것이 더 친절한 것이다. 공식 팜플렛에서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전쟁이 터지면 수많은 동물들이 다치고, 가스에 중독되고, 공포에 미쳐날뛸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당국이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어쩔수 없이 동물들을 폐사시킬 것이다."
방독기능이 있는 우리안에 들어가 있는 강아지. 공습대비계획의 일환이었지만, 불행히도 작동하지 못했다.
설레발과 용두사미
1939년이 끝나가고있었지만, 예상했던 아포칼립스는 오지 않았다. 독일 폭격기들은 영국 영공에는 접근도 못했다. 동물들을 성급하게 폐사시킨것은 의미 없는 일이었고, 어떤 지역에서는 생쥐들이 창궐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고양이의 가격이 엄청나게 올라갔다. 영국인들이 전쟁통에 익숙해지면서 자신의 애완동물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엄청난 후회와 분노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설레발과 혼란과 용두사미로 이어지는 일련의 해프닝은 2차대전에 돌입하는 영국의 특징으로 보였다. 그런데 이러한 점은 의문을 자아낸다. 상황이 이렇게 안좋게 돌아것이라 예상했다면 영국인들은 왜 정부가 전쟁을 선포하는 것을 용인하였을까? 영국인들은 얼마나 정신적, 육체적으로 준비가 되어있었을까? 그리고 그들의 예상과 현실의 차이가 전쟁을 수행하는데 악영향을 미쳤을까?
1938년 가을, 영국인들은 안도감을 보이며 뮌헨협정을 반겼다. 그러나 영국 안보가 얼마나 허술한 상황인지 확인한 영국인들은 분노를 느꼈으며 동시에 뮌헨 협정이 전쟁을 막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느꼈다. 그 다음해에 일어난 두 차례의 주요 사건은 독일에 대한 최악의 두려움을 확인하고 전쟁은 필연적일 뿐 아니라 필수적이라는 분위기를 불러일으켰다.
크리스탈나흐트(독일 유대인 교회가 파괴된 사건)의 잔혹함과 반유대법안의 통과는 단순한 도덕적 충격이 아니라, 나치 독일이 세계평화에 얼마나 큰 위협이 되는지 명명백백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1939년 3월, 나치독일에 의한 프라하 점령은 나치가 본격적으로 전쟁의 마수를 펼쳤으며, 영국이 설정한 합의를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1939년 7월 한 징집병이 군복을 입어보고있다.
1939년 봄, 나치즘은 영국 정치의 좌우파 모두에게 큰 위험이 될것으로 보였다. 좌파에겐 유럽 전역에서 파시즘과의 투쟁이 점점 중과부적인 상대와 싸우는 것처럼 보였다. 이는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제국에 시비를 거는 독재자의 도발에 분노하는 우파의 애국심과 일치하였다. 프라하 점령 이후, 보수당은 안보와 프라이드를 지키기 위해 행동할 것을 요구하였고, 양측 모두 분노는 특히 독일의 오판을 주도하는 히틀러에게 집중되었다. 이것이 깊숙히 자리한 정치적, 계급적 적대감을 넘어서 공동의 적을 굴복시킬 필요성에 의해 성립된 거국내각의 근거가 되었다.
히틀러에 대한 유화정책은 1938년 겨울 옥스포드와 브릿지워터에서 있었던 보궐선거의 중요 이슈였다. 그러나 1938년 당시 네빌 체임벌린 수상의 외교적 전략의 실패가 내각에 대한 완전한 신임의 상실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1939년 여름의 여론조사에서는 체임벌린 수상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 덕분에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율을 보이고 있었다. 실패에 대한 동정은 정치인들이 굳이 바라는 바는 아니었지만, 전쟁이 발발했을때, 체임벌린 수상이 완전히 정치적으로 사망선고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전쟁의 가능성에 대한 정치권의 동의는 전쟁준비를 가속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RAF(Royal Air Force, 공군)의 성장은 특히, 새로운 공장과 비행장의 건설과 신형기체의 확보 덕분이었다. 한편, 위기 이후 자원입대자들이 폭발하면서 본토수비대와 민방위군의 징집이 확대된 징집목표에 근접할 수 있었다. 1939년 9월에 이르자 250만명에 달하는 영국인들이 전쟁준비에 동참하게 되었다. 징집은 4월에 처음 도입되었는데, 이는 지원자들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영국이 유럽의 사태를 그만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징집으로 인해 자원입대자들은 줄어들기는 커녕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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