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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을 차지한 회사 - 동인도회사의 흥망성쇠(2)

category # 역 사 2017. 1. 27.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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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도회사의 지배는 '파고다 나무 흔들기', '벵갈의 약탈자'라는 별명으로 대변되는 부정부패와 과도한 이윤추구로 악명이 높았다. 동인도회사에 의해 임명된 Nabobs(인도 태수)들은 인도인들의 희생으로 엄청난 재산을 축적하였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은 동인도회사령 인도의 기초가될 무언가가 발견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상인들은 행정가가되고 정치와 경제에 대한 영국인들의 생각과 인도의 특수한 상황이 양립가능할 수 있을 제도가 개발되었다. 


인도의 엄청난 인구에 대비하여 열악한 사회 정치 그리고 경제적 제도로 인해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인 terra nullius(비어있는 땅)이 적용되기 어려웠다. 그래서 동인도회사는 토지와 노동력에 대한 통제력을 그리 높게 가져가지는 않았다. 다른 영국 개척자들에 의해 건설된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공과 캐리비안 연안 식민지와는 다른 형태였다. 이들과 달리 인도는 '착취 식민지'였다. 따라서 동인도회사가 가장 중요시하였던 것은 내부 시장과 국제 무역을 통제하고, 농민 생산을 조정하며, 무엇보다 세금을 징수함으로써 얻어지는 이익이었다. 세금은 대규모 상비군과 동인도회사 간부들, 고용인들에게 지급되었다. 물론 이들은 결국 인도에 정착할리 없는 인원들이었다. 


인도에서 증대되는 동인도회상의 정치적 영향력은 영국 국내에서 커다란 논쟁거리가 되었다. 1757년 플라시 전투의 결과로 동인도회사의 활동은 의심을 자아냈다. 시인이었던 William Cowper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피로 공장을 세우고. 무역을 수행하다/ 순수한 상업적 정의의 하얀 로브(robe)를 칼 끝으로 붉게 물들이네"


아메리카 식민지의 상실, 노예무역 반대 움직임 그리고 프랑스 혁명의 결과로 '인도에 대한 의구심'이 영국에서 중요한 정치적 이슈로 떠올랐다. 인도에서 행해진 동인도회사의 부도한 활동, 개인적이며 동시에 조직적으로 퍼진 부패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영국과 '아시아 형태'의 정부간에 발생한 긴장감이 불러일으킨 제국주의의 힘이 무엇인가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논쟁, 영국의 '비-백인' 식민지에 대한 책임과 의무에 대한 논쟁이 그것들이었다. 런던 시민들은 동인도회사의 18세기 후반의 활동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인식은 귀국하는 현지 관료들에 대한 적개심에서 명백하게 들어났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는 전직 총독이었던 Warren Hastings가 개인 부정부패와 관리실패의 책임을 물어 탄핵당하고 재판에 회부된 시점에서 최고조로 치솟았다.



인도에 대한 의구심



동인도회사를 규제하기 위한 움직임은 1770년대에 시작되었다. 노스 규제 법안(North's Regulating Act)가 1773년 피트의 인도 법안(Pitt's India Act)가 1784년 발효되었는데 이 법안들은 모두 동인도회사의 활동을 의회의 감시아래 두기 위함이었다. 동시에 총독이었던 Charles Cornwallis의 주도하에 1780년대와 90년대에 걸쳐 진행된 일련의 내부개혁을 통해 행정부를 거의 재구성하다시피하여 만연했던 부정부패를 일소하였다. 이러한 개혁은 결국 동인도회사의 이미지를 제고하고, 사업활동의 효율성을 증대시키기 위함이었다. 결국 Hastings가 무죄로 석방되고  Cornwallis의 개혁이 성공적으로 완수됨에 따라 동인도회사는 과거의 평판을 다시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동인도회사는 스스로를 인도에서 시민사회의 지평을 넓히고, 사유재산을 보호하며 공명정대한 정의를 가져다 줄 관대하고 합법적인 통치자로 변모하고자 하였다.


사법부의 재구성과 1793년 발효된 영구정착협약(고정된 토지세 부과)와 같은 개혁은 '인도사회의 진보'라는 캐치프레이즈하에 진행되었다. 동인도 회사는 인도 고유의 독특하지만, 논란이 많은 sati(과부들을 화형하는 풍습)을 금지시키는 등 사회 개혁 법안을 선전하기 위한 홍보로 요약가능한 '문명화 사명(civilising mission)'이라는 레토릭을 사용하며 점점 더 인도에서의 입지를 정당화해 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들이 지역 경제와 사회에 준 충격은 사뭇 달랐다. 이런 개혁은 결국 동인도회사의 통제력을 강화하고 영국의 약탈을 용이하게하며, 다른 유럽 경쟁자들을 인도에서 배제하여 장기적인 전략적 유리함을 유지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1857년 세포이항쟁


19세기 초반 인도에 심각한 경제적 불황이 닥쳤다. 과도한 토지세와 투자의 부재는 농업발전에 악영향을 미쳤고, 직물과 같은 전통산업은 유럽의 공장에서 만들어진 저렴한 수입물들때문에 환폐화되었다. 1770년 벵갈, 1837년 아그라 지역에는 대기근이 들었는데, 동인도회사의 작물 시장에 대한 자유방임주의 정책과 구호활동의 실패로 인해 사태가 악화되기도 했다.


19세기 초 영국의 인도에 대한 태도는 역사가 Peter Marshall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자책'보다는 '자부심과 만족'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그러나 이시기 동인도 회사의 활동과 그 결과에(의도에 상관 없이) 대한 비판은 사라지지 않았다. 전적으로, 오히려 이 쟁점들은 영국 대중들사이에서 계속해서 논란이 되어왔다.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미디어를 통해 이러한 쟁점들이 표출되었는데, 짧았지만 활발하게 활동했던 British-India 협회(인도를 계몽하기 위해 설립된 단체)의 예를 찾을 수 있다.


          

동인도회사와 영국령 인도의 깃발


인도인들 역시 순순히 동인도회사의 지배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쫓겨난 인도의 지배계층은 수많은 사절단을 영국으로 보내 동인도회사의 학대와 중대한 조약위반들에 대해 항의하였으며, 수많은 직간접적 저항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 역사가 Christopher Bayly가 말한 것처럼, 그러한 투쟁들은 동인도회사의 지배를 종식시킨 사상초유의 규모로 일어난 1857년의 사건(세포이 항쟁)으로 이어졌다. 1857년 일어난 항쟁(영국에 따르면 '인도인 폭동', 인도의 표현에 의하면 1차 독립전쟁)으로 인해 영국 당국은 동인도회사의 실패에 대한 비판을 재빠르게 수용하였다. 잔혹함과 양측에 수많은 인적 손실을 안기고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배는 이미 항구를 떠나서, 동인도회사의 인도에 대한 통치권은 영국의 왕관에 귀속되게 되어 Raj(영국령 인도)로 표현되는 제국주의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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