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해군 징병소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있다. 1939년 2차대전 개전 당일
가족과 집을 지키고자하는 열정으로 많은 장정들이 자원입대를 신청하였다. 1938년 초부터, 리즈와 노팅햄같은 대도시에서는 등화관제 훈련이 진행되었다. 뮌헨협상의 여파로 주부들은 전쟁준비에 필요한 조언이 담긴 팜플렛들을 받기 시작했다. 실제로 행해진 것은 지역, 정치적 신념, 부와 나이에 따라 다양했다. 시간과 돈과 열정이 있는 사람들은 특별예방조치를 받을 수 있었다. 백화점에 마련된 특별 공습 예방(ARP Air Raids Precautions) 코너에서 정전에 대비한 물건과, 창문을 보호하기 위한 갈색 테이프를 구매하였으며, 개인 방공호를 구축하였고 여의치 않은 자들은 전쟁중에 총 150만개나 설치된 Anderson Shelter를 배급받았다. 그러나 세계를 뒤흔들 또 다른 전쟁을 앞두고 무력감을 느끼는 시점에서 국가 전체가 전시체제로 돌입하는 것이 쉬운일은 아니었다. 만약 이 당시를 국가 전체가 일치단결하여 전쟁에 대비했던 시기로 기억한다면, 이는 진실에서 상당히 동떨어져있는 생각이다. 보수당 정부와 노동당 사이에는 상당히 뿌리깊은 적대감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영국인중 소수만이 전쟁을 원하고 있었고 대다수의 사람들에겐 전쟁이 눈앞에 닥치기 전에는 이에 대비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런던의 한 극장이 개관했음을 요란하게 선전하고있다.-1939년 9월 15일
애국적 야당
군사징집은 체임벌린 총리와 노동당 사이의 정치적 분열이 계속해서 커지고 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총리가 과거 자원입대를 공약으로 내걸었기에, 징집은 좌파에 대한 배신으로 보여졌다. 징집으로 인해 산업징병과 노동희석(전쟁 노력을 위해 숙련 노동에 미숙련 노동자를 투입하는 것)의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동당으로써는 나치즘과의 투쟁을 중앙정부의 통제하에 일원화하려는 계획을 반대하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9년 4월 133명의 하원의원이 군사훈련법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전쟁이 발발하자 노동당은 '애국적 야당'을 당론으로 채택했지만, 채임벌린이 이끄는 내각으로 입각하는 것은 거부하였다.
한편 아직 많은 사람들이 일촉즉발의 전쟁의 신호를 무시하고 있었다. 1939년 여름, Mass Observation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우리가 전쟁에 돌입하여야한다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다른 방안을 찾아야할까요?"라고 물었을때, 단지 2%만이 전쟁에 열정적이었으며, 43%는 그래야 한다면 전쟁에 참여해야한다고 답하였지만, 나머지 1/3은 전쟁 말고 다른 수단을 찾아야 한다고 답하였다. 일간지의 1페이지에는 항상 새로운 군대(New Army)나 폴란드 보호선언에 대한 논쟁에서 비롯된 사회적 분열이 등장하였다. 전쟁 발발 한달전이 되어서야 전국, 지방신문에서 전쟁에 찬성하는 여론이 우세해졌다. 자원입대 시스템은 여전히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지만, 다행히 전쟁이 발발하던 시점에 목표였던 160만명을 방위군으로 편성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필수 요원들의 숫자를 채우지 못하였다.
정육점 주인이 고기 입고 소식을 알리고 있다. 1939년 9월 5일. 고기는 1940년까지 배급품목에 포함되지 않았다.
전쟁준비는 여전히 많은 취약한 부분에서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었다. Anderson Shelter는 빈곤층에게 무료로 제공되었지만, 여전히 정원과 물이 들지 않는 평평한 곳이 있어야 했다. 지방 당국과 사유지를 가진 지주들은 공공 피난소를 제공할것을 요구받았지만, 그 준비와 퀄리티가 심각하게 떨어졌다. 전쟁에 관한 사항을 알리려는 정부의 지속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돌입한 1939년 11월 3일에도 여전히 공습경보와 해제 알람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아마도 전쟁에 대비하는 것이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게 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던것 같다.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전쟁에 대비하여 시간과 돈과 감정을 쏟는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의미에서 런던에서 있었던 애완동물 학살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얼마나 많은 애완동물들이 죽었는가가 아니라 반대로 얼마나 적게 죽었는가이다. 한 추정에 의하면 당시 런던에 개와 고양이가 200만 마리정도 있었다고 한다. 런던 시민의 4/5는 자신의 동물을 죽이지 않았다. 이 주저함은 애완동물에 대한 국가적 헌신의 결과가 아니었다. 시민들은 애완동물을 사랑했지만, 최악의 예측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들은 경찰이 가스에 미쳐날뛰는 페키니즈와 페르시안 고양이를 처분해야 하는 상황을 피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평화에 대한 희망은 1939년 9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남아있었다. 10월 6일 히틀러는 평화협상을 제안했다. 이 시기에 총리관저에서 받은 편지의 75%이상은 전쟁의 끝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보수당과 노동당 하원의원들 역시 평화협상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평화에 대한 요구보다 더 자주 나왔던 것은 전쟁을 수행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이었다. 공포를 예측한 전망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간혹 해군과 공군이 활발한 활동을 하긴 했지만, 전쟁이 시작하고 8달이 지나도록 영국본토에 적은 등장조차 하지 못했다.
오늘날 "따분한 전쟁 Bore War"이라고 불리는 이 시기동안 영국인들은 혼란과, 결핍 그리고 불편함을 견뎌내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은 독일이 아니라 영국정부에 의해 발생했다. 정부는 시민들을 보호하고 총동원을 시작하기 위한 긴급대책을 시행에 옮겼다. 이 대책은 도시에서 아이들과, 부녀자들 그리고 정부 관료들을 대피시키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폭격에 의한 참사를 막기 위해 등화관제가 시작되었으며, 군중들이 모이는 모든 형태의 엔터테인먼트를 중지시켰다. BBC뉴스에 대한 검열이 시작되었고 세금도 급격하게 인상되었다.
배급표가 플리머스시 청사에서 플리머스와 데본포트의 주민들에게 배급되고 있다. 1939년 11월 5일
되돌아 보면 이 시기의 통제는 전쟁 후반에 이루어진 통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시기, 전쟁에 대한 지지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에 야당과 언론은 크게 반발했다. 10월 11일 야당인 노동당 당수 Arthur Greenwood는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기차도 통제, 불빛도 통제, 여기도 통제, 저기도 통제, 전부다 통제당하고 있습니다. 정부의 결정은 모든 이들의 삶을 끔찍하게 만들었습니다."
노동당과 시민들의 자발적인 도움 없이는 전쟁준비에 모든 역량을 투입하는 것이 어려웠기에, 정부는 이러한 불평들을 수용하였다. 해군장관으로 돌아온 Chruchill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간섭”에대한 언론과 대중의 반대에 대하여 내각에 경고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정부가 태도를 바꿔 대중이 모이는 엔터테인먼트 제한을 해제하고, 배급제를 중지하였지만, 여전히 전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거나, 기득권만 보호한다는 비판에 노출되었다. 이 모든 것들은 어느 정도 진실이었지만, 이는 많은 영국인들이 원하는 두가지 목표 사이에 모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첫째, 히틀러를 박살내는 것. 둘째, 전쟁 전의 삶을 지키는 것. 그러나 첫번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노력은 두번째 목표에 심각한 위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는 우유부단으로 나타났다. 전쟁 준비상황은 크리스마스가 지났어도 9월보다 조금도 더 진척된 것이 없었다. 체임벌린의 정책의 실패는 영국의 실패 라기보다 총리 개인의 실패로 받아들여졌다. 전쟁 발발 후 1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100만명에 달하는 실업자가 존재하였다. 그러나 총리가 완전 고용에 필요한 산업 징집제를 실행하길 원한다 할지라도 1940년 2월에 교통노조의 지도자가 “정부가 전쟁의 기회를 틈타 노조원들의 자유를 침해한다면, 반정부투쟁을 벌일것이다.”라고 선언하는 와중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국가를 단합 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노조의 지도자는 Ernest Bevin이었다. 이 발언 직후 그는 노동복지부 장관으로 취임하여, 노동자의 자유를 그 어느때보다 강하게 침해한 정책들을 감독하였다. 물론 체임벌린이 아니라 처칠의 내각이었고 애완동물이 영국국민에게 요구되는 최소한의 희생중 하나가 되어버린 또다른 상황이긴 하였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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