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인민정부 주 홍콩 연락판공실에서 내놓은 해결책은 위기를 조장하여 중국이 홍콩의 자치권을 가져가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공포가 클수록 더 좋다.” 이는 중국에서 파견한 특사가 한 말이다. 2명의 범죄 전과자들이 입법회 의원들을 저격했다. 뉴스에서는 공안이 “적대적인 외국 세력”에 의해 선동된 테러리스트들을 성공적으로 사살한 것을 축하하며, 국가보안법이 즉시 발동되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Extras가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이 홍콩의 자치권을 완전히 박탈하기 위해 사용할 수단이 이처럼 상당히 악랄할 수 있다는 상상력 덕분이었다. 이 영화가 공개되고 겨우 1년 정도 지나자 이러한 공포가 홍콩 주민들 사이에서 널리 퍼졌다. 예를 들어, 홍콩의 민주화 운동 단체 내부에서 조차 중국의 지령을 받고 폭력적인 사고를 일으키려고 준비하고 있는 끄나풀들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실제 사고가 발생하면 중국정부가 이를 구실로 홍콩의 자치권을 박탈한다는 이야기도 함께 퍼졌다.
오늘날 이렇게 홍콩을 불안정한 상황으로 만든 것은 바로 중국에 완전 반환 전 홍콩에 50년간 자치권을 부여한다는 영국과 홍콩 그리고 중국의 좋은 의도였다. 물론 안좋은 결과를 가져오긴 했지만 말이다. 또 답답하고 근본적으로 불안정한 정치체제가 진정한 민주화를 요구하는 새로운 세대와 마주하게 되었을 때 구사하는 구태의연하고 진부한 대응도 한몫 했다.
홍콩과 중국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고 있는데, 이는 일종의 부정적 순환고리이다. 처음에 홍콩에서 진보의 횃불을 들었던 세대들은 중국과의 협상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지 못하자, 더 젊고 과격한 다음세대들로 교체되었다. 그러나 이들 역시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하면 점차 더 조급해지며, 과격화된다. 이 조급함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50년간의 유예기간동안 약속 받았던 자치권 때문이며, 이런 실망감은 완전한 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런 순환구조의 시작은 1970년대, 민주화 운동가 그리고 중국 애국주의 및 반 부패 운동을 결합한 자유주의 운동가 그룹이 부상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1980년대 영국이 식민지에서 대의 민주주의 요소를 도입했을 때 공직에 들어서기 시작했고, 중국에 대한 홍콩반환 조건이 공표되자 홍콩의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견지했다. 변호사, 학자, 지역사회 지도자 및 경제 전문가들로 구성된 이들은 중국이 홍콩의 경제적 중심지로서 뿐만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실험실로써의 가치를 인정해 줄 것이라 희망했다. ‘일국양제’ 체제하에서 인내심 있게 봉사하면서, 홍콩주민들의 보편적 일반선거권과 홍콩의 자치권을 단계적으로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 믿은 것이다.
1997년 홍콩반환이 실행된 후 초기에, 범 민주주의자들로 알려진 이들 지식인들은, 홍콩은 자유주의 사회의 모범적인 예시로써, 또 중국 본토 기업에 투자하는 홍콩 주민들의 공로를 인정받음으로써, 중국으로 하여금 단계적으로 자유주의적인 방식을 수용할 수 있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이는 일부 범 민주주의자들에게는 중화민족으로서의 정체성과 관련된 일종의 복음과 마찬가지였다. 중국 본토의 점진적인 변화를 유도하는 것은 중화민족으로서의 의무라 믿은 것이다. 이는 중국이 언제나 경기를 일으키는 ‘분리주의’가 아니라 애국심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 범 민주주의자들은 중국을 너무 무르게 보고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지난 2009년 홍콩 행정당국은 주민들과 사전협의도 없이 홍콩을 중국본토에서 건설되고 있는 고속전철 네트워크와 연결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범 민주주의자들은 이를 막으려 노력했지만, 입법원에서의 의석이 부족했다. 홍콩 전역에서 반대시위가 벌어졌다. 이 시위는 범 민주주의자들만 참여한 것이 아니었다. 중국이 조용히 홍콩을 집어 삼키려는 인프라 투자계획을 걱정하는 홍콩 원주민들이 들고 일어선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에 따르면, 이 고속철도계획 반대 시위가 홍콩의 정치 문화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다고 한다. 범 민주주의자들의 방식은 효과가 없으며 시위만이 권리를 지키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 홍콩에서 가장 유명했던 시위는 중국 정부가 배후에 있었던 1967년 반 영국 시위였으며 이는 중국 민족주의 정서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 다음에 있었던 큰 변곡점은 2010년에 일어났다. 중국 정부가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하게 드러난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도입한 것이다. 이는 홍콩의 지역 정체성이 빠르게 확대되고 있는 것에 대한 중국 정부의 두려움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지역 정체성이 확대되면 분리주의에 영향을 줄 수 있었으며, 대만 문제에까지 영향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급조한 교과서 도입은 곧 문제를 야기했다.
학생시절 역사교과서 개혁 반대 시위에 참여했던 한 홍콩 주민은 “교과서에서는 국기가 올라갈 때 애국심을 보여주기 위해 울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저는 이 교과서가 홍콩 주민들을 세뇌시키기 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감정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교과서에서는 과거에 어떤 일을 했든, 조국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라 말했다.
민족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띈 이 교과서에 대한 반대 시위는 빠르게 확대되었다. 2012년 7월 29일 약 10만명의 시위대가 홍콩 행정청 앞에 운집했다. 이 시위대는 집회기간동안 빠르게 지도자로 부상한 17살의 앳된 학생 조슈아 원이 이끌었다. 그는 나중에 “모든 전투를 최후의 전투로 여겨야한다.”고 말했는데, 이 시위로 인해 결국 중국 당국도 한발짝 물러서게 되었다.
신 교과서를 철회 시킨 것도 놀라웠지만, 이 시위로 인해 홍콩의 반 정치 기득권 운동이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는 점도 놀라웠다. 천안문 사건이 재현되는 것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는 중국 당국은 항생이 주도하는 시위에 대해 조심스럽게 접근했고, 이들이 홍콩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을 막겠다는 분명한 신호를 보냈다. 2012년 이래로, 홍콩의 독립을 요구하는 어떤 요구도 반역에 해당한다는 분명한 태도와 위협적인 경고를 보낸 것이다. 범 민주주의자들이 비록 일국양제의 시스템을 존중한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중국정부는 이들에게 어떠한 의미 있는 성공도 허용하지 않고있다.
범 민주주의계 사람들은 스스로를 중국인으로 여기고, 홍콩 역시 중국의 일부로 간주한다. 물론 홍콩이 민주적 정부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 믿긴 하지만, 여전히 중국인이며, 중국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범 민주주의계 사람들은 홍콩을 잘 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으며, 홍콩의 독립을 거부한다고 생각한다. 홍콩의 독립을 주장하면 중국의 분노를 사게 되며, 중국이 분노하면 홍콩에 민주주의가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홍콩의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중국은 절대 홍콩의 민주주의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홍콩 독립을 주장하는 이런 반-범 민주주의 여론은 홍콩에서 급격하게 확대되고 있으며 특히 40대 이하 젊은 층에서 두드러진다. 이들은 홍콩이 중국의 일부라는 점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여론의 변화는 지난 9월 있었던 홍콩 입법원 선거에서 그대로 반영되었다. 총 투표수의 20% 이상이 홍콩의 독립 혹은 완전한 자치권을 주장하는 후보에게 돌아간 것이다. 5년 전에는 이 독립주의자들의 득표수는 별 볼일 없는 수준이었다.
“나는 홍콩 사람이고, 홍콩은 자체 주권과 정부 그리고 국경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해외로 여행을 떠날 때 국적란에 중국이라고 적어야 합니다. 거기에 쓴 중국이라는 단어를 볼때마다 기분이 이상해 집니다. 중국사람이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에 살고 있고, 내 인생을 홍콩에서 보냈고, 중국은 하나도 친숙하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저는 소외감을 느낍니다. 중국에서 보는 어떤 것도 저와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는 홍콩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의 발언이다. 이 사람은 ‘지역주의’로 알려진 독립운동의 가장 두드러진 인물 중 한명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운동은 고도로 분화되었다. 어떤 이들은 완전한 독립을 원하고, 어떤 이들은 확실한 자치권과 홍콩의 문화에 대한 보호만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 소수이긴 하지만 어떤 이들은 홍콩을 다시 영국의 감독 아래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홍콩의 젊은 시위대들은 2014년 9월 가장 큰 문턱을 넘었고, 79일 동안 대규모 군중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며 홍콩 역사상 가장 큰 시위에 합류하였다. 이는 범 민주주의자들과 다른 민주화운동 단체들이 요구했던 홍콩의 선거제도 개혁이 실패한 직후 일어났으며, 수천명의 시위대가 운집하여 노란 우산을 들고 있는 인상적인 모습으로 유명해졌는데, 이는 공안의 최루탄을 막기위한 방법이었다. (이로 인해 이 시위는 ‘우산 혁명’ 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시위를 주도한 사람은 이전 역사교과서 반대 투쟁을 이끌었던 조슈아 왕이었다. 시위대는 시민들의 힘으로 홍콩의 완전한 민주주의를 얻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으며 나이 많은 주민들까지 불러 모으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끝내, 시위대는 정치 개혁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자 갑자기 조슈아 왕과 다른 운동가들은 다른 범 민주주의계와 마찬가지로 인내와 절차를 중시하며 너무 나이브하고 로맨틱한 간디 식의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고 비난 받기 시작했다.
한 민주화운동 지도자는 이렇게 말했다. “시위대들이 교과서 개혁을 저지했을 때를 다시 떠올려보면, 우리는 마치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골리앗을 상대하는 다윗처럼 보였죠. 그러나 우산혁명이 실패로 돌아가고 아무 것도 바뀐 것이 없자, 사람들은 이를 경멸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이렇게 온화한 저항으로는 중국의 마음을 바꾸지 못할 꺼야.’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결과 일부 시위대들은 더 과격해졌다. 2016년 홍콩의 설 기념 행사기간동안, 젊은 시위대들이 모여서 공안을 향해 벽돌을 던졌다. 아직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식의 폭력시위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이런 폭력적인 방식도 필요해 질 것이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 일에 대해 점점 무관심해져가기 시작했으며, 이는 중국이 바라던 바이다. “우리는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인들이 경험한 것과 같은 시기를 겪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끈다면 편안한 삶을 살 수 있겠지만, 만약 정치문제에 관심이 있다면, 아마 굉장히 무력해 질 것입니다. 얻을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종합해 봐도 우리에겐 희망이 없다는 결론만이 나옵니다. 특히 정치적 분야에서요. 가장 무서운 것은 공안도, 총도 아닌 사람들이 점점 희망을 잃어간다는 사실입니다.” 홍콩의 민주화운동가 Xeron Chen의 말이었다.
Chen은 청년신정당 소속 의원들이 벌인 퍼포먼스와 같은 시위들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들어냈다. 여기에는 정치 변화를 위한 어떤 현실적인 아이디어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Chen은 주변 홍콩 주민들에게 대화와 설득을 통해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믿음을 불어넣으려 하고 있다. 그는 현실적인 방안 없이 변화를 주장하는 것은 선동에 불과하다 주장하기도 했다.
다른 젊은 운동가들은 홍콩에서의 정치 개혁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현 세대의 투쟁이라 여기고 있다. “우리는 홍콩을 사랑합니다. 여긴 우리 조국이고, 우리는 조국을 지켜야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다른 나라로 망명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우리는 조국을 위해 그리고 우리의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싸우지 않는다면, 중국 정부는 우리에게서 하나하나씩 차례대로 모든 것을 빼앗아 갈 것입니다. 아마 시간이 오래 걸릴 것 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30년, 60년 혹은 100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는 의미 있는 투쟁이며, 홍콩을 위한 싸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