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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전쟁의 공포와 인터넷의 기원 (4)

category # 역 사 2017. 3. 16.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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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작용 컴퓨팅에 관한 Licklider의 구상은 매우 명확했다. 이 구상 그 자체가 1963년 당시에는 매우 중요했는데, Licklider가 하고 있던 것은 연구의 기초를 다지고 있는 것이었지 실제 컴퓨터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초기 연구에서 실제로 눈 앞에 보여줄 것이 없다는 것은 잠재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당시 펜타곤에서는 컴퓨터의 잠재력에 대해 완전히 이해한 사람은 매우 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Ruina 1963년 펜타곤을 떠나고, 그의 후임으로 코넬 대학교의 과학자였던 Robert Sproull이 부임하여 Licklider의 전체 프로그램을 거의 취소하였다. 우주 프로그램을 관리하고, 거의 5억달러에 달하는 예산을 집행하던 ARPA 설립 첫해의 짧은 전성기가 끝나고, 1960년대 중반에 들어서자 ARPA의 예산은 27400만달러까지 축소되었다.

 

SproullARPA의 예산 1500만달러를 더 줄이라는 압박을 받았으며, 지난 2년동안 결과물을 실제로 생산하지 못한 프로그램을 색출하였다. Licklider의 컴퓨터 관련 프로그램은 이 목록의 최상단에 위치해 있었으며, ARPA의 국장은 이 프로그램을 폐쇄하기 바로 직전까지 갔다.

 

Licklider는 침착하게 이 위협에 대처했다. ‘좋습니다. 그래도 이 프로그램을 취소하기 전에, 연구실에 한번 방문해보지 않으시겠습니까?’라며 Sproull에게 제안한 것이다. SproullLicklider와 함께 3,4개의 주요 컴퓨터 센터를 방문하였고, 여기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Licklider는 자금지원을 계속 받을 수 있었다. 몇 십년이 지난 뒤, 그에게 거의 인터넷을 죽일 뻔한 인물이라는 평에 대해 물어보았을 때, Sproull은 웃으면서 그렇다 대답했다고 한다.

 

Licklider 1964ARPA를 떠날 무렵, 그의 투자는 드디어 크고 작은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MIT에서 ARPA가 후원하는 시분할 시스템이 첫번째 이메일 프로그램을 개발한 것이다. 이 프로그램의 이름은, Tom Van Vleck이라는 학생이 이름 붙인 MAIL이었다. 스탠포드 연구소에서는 앞서 언급한 Engelbart가 사용자가 컴퓨터와 직접 상호작용할 수 있는 다양한 도구를 실험했다. 가벼운 펜과 같은 장치를 시험해 본 후에, 그는 결국 마우스라 불리는 작은 나무 블록에 정착했다.

 


컴퓨터 그래픽 분야에서 벌써 탄탄한 명성을 얻은 Ivan Sutherland라는 젊은 컴퓨터 공학자는 Licklider을 대신해서 팀을 이끌고 있었는데, 다른 컴퓨터 공학자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는 UCLA에서 3대의 컴퓨터를 이용하여 네트워크를 구축하려 했지만, UCLA의 연구원들은 이것이 그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지 이해하지 못했다. 또 연구원들은 네트워크로 연결된 컴퓨터 리소스를 다른 사람들이 전용하는 것에 대해 걱정하였다. 당시 UCLA의 대학원생이었던 Steve Crocker는 그 당시의 싸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긴장감이 너무 높아져서 서로 싸우려는 사람들을 갈라 놓으려고 경찰까지 불러야만 했다.” ARPAUCLA에서 첫번째 컴퓨터 네트워킹 프로젝트를 수행하려 시도했을 때도 비슷한 저항에 부딪혔다. 컴퓨터 센터의 책임자는 시간에 맞춰 ARPA의 통제아래 무언가를 만들어 내야하는 것은 대학의 운영방식과 다르다ARPA와의 계약을 끝내기도 했다.

 

Sutherland는 좌절된 컴퓨터 네트워킹 프로젝트를 내 실패라고 불렀다. 사실 이는 실패가 아니었다. 다만 너무 일렀을 뿐이다. 그가 떠난 직후, 후임인 Robert Taylor가 이를 물려받았다. TaylorSutherlandLicklider와 같은 명성은 없었지만, 그는 비전과 결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1965년에 그는 자신의 펜타곤 E-Ring 사무실에서 새로운 ARPA 국장인 Charles Herzfeld와 면담하면서, 지리적으로 분산된 기지에 위치한 컴퓨터를 네트워크로 묶을 것을 제안하였다. 다행히 Herzfeld는 오랫동안 컴퓨터에 관심을 가져왔었다. 시카고대학의 출신으로서 그는 Von Neumann의 수업을 듣기도 했는데 이 강의에서 Neuman2차대전 때 포병의 탄도계산을 위해 만든 ENIAC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나중에 ARPA에서만난 LickliderHerzfeld는 친구가 되었는데, Herzfeld는 Licklider의 컴퓨터-인간의 공생에 대한 아이디어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저는 일찍부터 Licklider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Herzfeld는 이렇게 기억했다.

 

Taylor 2년전 Licklider가 수행했던 것과 같은 작은 규모의 실험을 제안하지 않았다. Taylor는 전에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중요한 미 대륙 횡단 컴퓨터 네트워크를 만들고 싶어했고, 이를 위해 중요한 신기술과, 투자 그리고 엄청난 숫자의 연구원을 요구했다.

 

돈을 얼마나 줘야 되겠나?” Herzfeld가 물어보았다.

 

백만 달러 정도 있으면 구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Taylor가 대답했다.

 

그렇게 하게

 


이걸로 충분했다. 결국 인터넷의 전신이었던 ARPANET에 대한 예산은 단 15분 정도의 대화로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ARPHANET 1960년대 당시 굉장히 복잡했던 내부 사정의 결과였다. 매우 중요하지만 느슨하게 정의된 군사 문제, 가능한 모든 관점에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유, 결정적으로 비범했던 연구 책임자와 그의 해결책, 군사 문제와 관련이 있지만, 국방부의 협소한 이해관계를 넘어선 발명품. 냉전 기간의 편집증적인 공포에 기반한 사람의 마음에 관련된 연구과제는 핵무기의 공포에 대처하기 위한 연구과제로 변하였고, 다시 상호작용 컴퓨팅으로 재 해석되어, 오늘날 개인용 컴퓨터의 시대를 잉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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