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핵전쟁의 공포와 인터넷의 기원 (1)

category # 역 사 2017. 3. 13. 23:19
728x90
반응형



‘큰 문제가 생겼네,’ 1962 10 16일 아침 미국의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자신의 동생이자 법무부 장관이었던 바비 케네디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몇 시간 후 바비 케네디는 U-2 고고도 정찰기가 촬영한 쿠바의 사진을 응시하고 있었다. ‘좆 같은 러시아 새끼들이,’ 쿠바의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를 전복하고자 했던 TF팀들과 백악관에서 회의를 가지던 바비 케네디가 탄식을 내뱉었다.

 

정찰기에서 촬영한 사진은 소련의 미사일 발사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었다. CIA는 설치될 미사일의 정확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컴퓨터를 이용하였다. CIA의 결론은 쿠바에 설치될 소련의 미사일은 사거리가 최소 1600km가 넘어 불과 13분만에 워싱턴 DC를 타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첩보는 앞으로 2주간 이어질 위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쿠바에서의 대립이 격렬해짐에 따라 미군은 핵전쟁이 발발하기 바로 직전 수준인 데프콘 2를 발령하였다.

 

군과 정부의 지휘관들이 분단위로 정보를 요구함에 따라 미 공군의 IBM-473L과 같은 컴퓨터가 쿠바 미사일 사태에서 처음으로 실전 가동되어 실시간 정보를 처리하여, 군의 배치 같은 상황을 관리하였다. 컴퓨터의 처리용량이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 지휘관들 사이에 정보를 공유하는데 여전히 시간지연이 발생하였다. 그때가지만 해도 컴퓨터를 연결하여 정보를 전송한다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13일간 동안이나 이어진 대치와 군사적 긴장 끝에, 소련은 결국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핵전쟁은 피했지만, 이 위기를 거치면서 미군은 지휘 통제 역량의 한계를 느꼈다. 현대전의 복잡함을 고려한다면, 실시간 정보공유가 어려운 상태에서 핵전력의 효율적 통제에는 한계가 있음이 분명했다. 군의 지휘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과학자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펜타곤으로 영입되었다. 그가 내놓은 해결책은 국방부의 가장 유명한 프로젝트가 되었으며, 군대의 지휘 통제 뿐만 아니라 현대적 컴퓨터 혁명을 일으켰다.

 


Joseph Carl Robnett Licklider (JCR, 혹은 그 친구들에게 Lick이라 불렸음)은 펜타곤에서 많은 시간을 숨어 지냈다. 펜타곤에서 관료들은 그들의 중요성을 국방장관과의 접근성에 따라 측정하곤 하는데, Licklider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ARPA) D-Ring이라 부르는 펜타곤 내부의 창 없는 사무실에 작업공간을 주었을 때 만족했다고 한다. 그 곳에서 편안하게 일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Licklider ARPA 직원들을 펜타곤과 포토맥강 사이의 메리어트 호텔에서 열린 회의에 초청하여 미래의 사람들이 어떻게 컴퓨터를 사용하여 정보에 접근할 수 있을지 시연을 보여주었다. 미래형 컴퓨터의 개척자로서, Licklider는 사람들이 먼저 이 개념을 이해하기를 원했다. 그는 미래에 모든 사람들이 컴퓨터를 가지고 어떻게 사람들이 그 컴퓨터와 직접 상호작용 할 수 있을지, 그리고 컴퓨터들이 어떻게 모두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그는 현대적 인터넷과 컴퓨팅 시스템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이미 이를 사람들에게 시연하였다.

 

Licklider ARPA에서 조용하게, 하지만 설득력 있게 시연한 것들이 현대 인터넷으로 발전한 컴퓨터 네트워크에 얼마나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진짜 의문은 이것이다. 그는 왜 이런 일을 하였을까? 진실은 조금 복잡하다. 그리고 펜타곤의 관심에서 출발한 인터넷의 원형과 분리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펜타곤은 이를 전쟁 목적으로 개발하였는데, 지휘 통제의 효율성 그리고 핵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ARPA 1958년에 소련의 우주개발 역량을 따라잡기 위해서 설립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새로운 연구개발 분야로 분야를 확장하였다. 인터넷은 군사적 목적이 아니었다면 개발이 되지 않았거나, 최소한 ARPA에서 개발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ARPA에서의 컴퓨터 네트워크의 기원을 추적하려면 펜타곤이 Licklider와 같은 사람을 고용하도록 동기를 부여했던 것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이 이야기는 세뇌에서 시작한다.

 


1953년 메릴랜드 주의 앤드류 공군기지의 활주로 위에서 Bessie Dickenson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 울부짖었다. “아들아, 아들아! 하느님 감사합니다.” 3년동안 보지 못했던 그녀의 아들이 막 비행기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만남은 짧게 끝나고 말았다. 그녀의 아들 Edward Dickenson이 적과 내통한 혐의로 군사법정에 기소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전에서 포로로 잡힌 후 북한에 남기로 결정한 24명의 미군 포로 중 한명이였다. 하지만 Dickenson은 곧 마음을 바꿨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처음엔 환영 받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반역자로 비난 받았다. 군사법정에서, 그의 변호인은 버지니아 Cracker’s Neck 출신의 시골 청년이 포로기간동안 공산주의자들에게 세뇌 당한 것이라 주장했다. 하지만 8명의 배심원들은 그에게 징역 10년형을 선고하였다.

 

‘세뇌’는 1950년대 새롭게 등장한 단어였다. Edward Hunter라는 전직 스파이였던 기자가 사람의 마음을 지배할 수 있는 위험한 새로운 무기에 대해 글을 쓰면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미 세뇌에 대해서 몇 년 동안이나 연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터닝포인트였다. 1958년 그는 미 하원의 비-미국 위원회에 출석하여 소련의 세뇌 전술의 결과로 미국 포로 1/3 이상이 정보를 제공하거나 미국 내에서 선동을 하는 등의 방식으로 적에게 협력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정신전에서 소련인들은 이미 미국을 크게 앞서 나가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1959 Richard Condon의 베스트셀러 소설 The Manchurian Candidate가 출판되면서 세뇌가 사람들의 뇌리속에 깊게 박혔다. 유명한 부부의 아들이자 전쟁포로였던 주인공이 적에게 세뇌를 당해 미국으로 돌아와 비밀 스파이로 활동하면서 암살을 시도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알 카에다의 포로였다가 미국으로 귀환한 군인의 이야기를 다룬 미국 드라마 Homeland에서도 차용되었다.)

 

실제 세뇌 사건의 진실이 무엇이든, 사람들의 마음을 놓고 싸운 이 전쟁은 1950년대에 확대되었고, 1950년대 후반에는 펜타곤의 심각한 논의 주제였다. 미국과 소련은 이념 분만 아니라 심리학적인 전쟁도 벌이고 있던 것이다. 인간의 행동에 관해 물리학적, 화학적 원리를 알아내고자 하는 과학적 열망으로 펜타곤은 스미소니언 연구소의 고위급 관계자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스미소니언의 유명한 심리학 및 사회 과학 연구 그룹은 1959년에 설립되어 펜타곤의 장기 연구 계획에 대한 자문을 제공했다. 패널의 전체 보고서가 기밀로 구분되어 있지만, 연구 그룹의 수장이었던 Charles Bray는 논문을 통해 기밀로 분류되지 않은 일부 연구 결과를국방 이용을 위한 인간 행동 기술에 관한 연구라는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펜타곤의 심리학 분야에서의 광범위한 스미소니언 연구 그룹의 역할을 요약한 것이었다.

 미래에 장기전이 발생할 경우, 게릴라전과 침투작전 같은특수전이 존재할 것입니다. 적은 군과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복을 시도할 것이며, 전쟁포로들은 세뇌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군대는 혼란에 빠질 민간을 회복하고 응집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하며, 동시에 적의 내부에서 충성심의 대상을 바꾸려는 시도 또한 이루어져야 합니다....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