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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전쟁의 공포와 인터넷의 기원 (3)

category # 역 사 2017. 3. 15.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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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cklider가 컴퓨터 네트워킹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 같은 해에, 캘리포니아의 RAND Corporation의 분석가였던 Paul Baran신뢰할 수 없는 네트워크 리피터 노드를 사용한 신뢰할 수 있는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에서 Baran은 선제 핵공격을 받은 이후에도, 추가적인 핵 보복능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여분의 통신 네트워크를 이용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Licklider의 선언과 같이 Baran의 이 제안은 현대 인터넷의 구조와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시간이 지나고, 사람들이 인터넷의 원형에 대해 궁금해 하기 시작하면서, 누가 이 아이디어의 창시자인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인터넷의 기원을 어떤 특정한 사람 혹은 어떤 특정인의 개념에 국한시키는 것의 문제점은 사실 1960년대에 네트워킹 컴퓨터에 대해 생각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진짜로 필요한 질문은 누가 이 생각들을 현실로 옮겨냈냐는 것이다. RAND 연구소는 유력한 후보이다. 단순한 연구소를 넘어 씽크탱크 그 이상이었던 RAND 연구소는 ARPA와 같이 매우 유연한 조직이었다. 미 공군은 20세기 최고의 원자력 이론가들을 포함하여, 연구원들에게 엄청난 지적 자유를 부여한 RAND 연구소에게 국가 안보 문제를 포함한 많은 것들을 연구 의뢰하였다.

 


이 당시 Baran은 핵전쟁에 대한 현실적인 해결책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1960년 그는 핵공격을 받는 상황에서 통신시스템의 안정성을 테스트하기 위한 시뮬레이션에서 RAND 연구소의 동료들과 함께 연구하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중복성을 가진, 마치 그물망과 같은 네트워크를 구축했습니다. 각 노드가 1개만 연결되어 있으면 레벨 1, 십자가처럼 2개씩 연결되어 있으면 레벨 2, 그리고 레벨 3, 4였죠. 그런 다음 각각의 네트워크에 공격을 가했습니다. 무작위적인 공격이었죠.’


통신 네트워크를 일련의 노드로 생각해보자. 두 노드 사이에 단 하나의 연결만이 존재하고, 핵공격으로 이 연결이 파괴되었다면, 더 이상 통신을 할 수 없다. 반면 여러 개의 연결이 존재하는 다른 노드를 상상해보자. 일부 노드가 파괴되더라도, 다른 통신 경로는 여전히 살아있을 수 있다. Baran의 과제는, 얼마나 많은 연결이 있어야 충분할까? 였다. 시뮬레이션 결과 Baran과 동료들은 레벨 3의 네트워크 노드가 갖춰져 있다면 핵 공격을 받아도 2개의 통신 노드가 살아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적들이 통신망의 70%를 파괴하더라도, 여전히 통신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의미였다.

 

Baran은 나중에 이 실험결과를 미-소 양국이 서로를 향해 겨누고 있는 핵무기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여지길 원했다고 밝혔다. 어느 한 측이 선제 핵공격을 받아 거의 괴멸상태에 이르더라도 살아있는 통신망을 이용해 핵 보복을 실행할 능력까지 파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초기의 미사일 통제 시스템은 물리적으로 그리 견고하지 못했다. 따라서 어느 한 쪽이 상대방의 행동을 오해하고 선제 대응을 하고자하는 강력한 유인이 있을 수 있었지만, 전략무기의 지휘시스템의 생존성이 올라간다면, 보복능력 역시 적의 공격을 견뎌내면서 여전히 기능할 수 있다.

 

이 개념이 작동하도록 하려면, 네트워크 신호는 통신할수록 감도가 약해지는 아날로그가 아니라 디지털로 전환되어야 했다. 이것은 엄청나게 야심찬 제안이었고, Baran이 농담으로  ‘RAND 연구소는 연구는 하되 개발은 안 한다라 말했듯이, RAND 연구소 독자적으로 이런 시스템을 구축할 수 없었다.

 

RAND 연구소는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없었지만, 미 공군은 그럴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공군 지휘부 역시 Baran의 제안에 흥미를 보였다. 그러나 작업이 시작되기 전, 관료주의적인 조직개편으로 인해 담당부서가 Defense Communication Agency(미 국방 통신국)으로 변경되었다. Baran이 보기에 DCA의 담당자는 여전히 아날로그 세계에 머물러 있었다. Baran은 그가 모든 걸 망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 보다 차라리 프로젝트의 중단을 선택했다. 그리고 다른 적합한 파트너가 등장하기만을 기다렸고, 그의 고민은 ARPA의 등장으로 해결되었다.

 

Licklider는 쿠바의 미사일 위기가 두 강대국 간의 전면전으로 확대되려하던 바로 그 달에 ARPA에 합류하였다. 펜타곤의 고위 관료들에겐 ARPA의 지휘통제에 관한 과제가 핵무기에 관련된 것이 분명해 보였다. ARPA 부국장 William Godel ARPA의 새로운 임무는 Looking Glass의 대안을 찾는 것이라 선언하였다. Looking Glass는 군의 핵 아마겟돈즉 보복 핵 공격을 위해 핵무기를 장착하고 24시간 공중에 체류하는 폭격기의 코드명이었다. 펜타곤의 국방 연구 및 기술 담당 국장인 Harold Brown 역시 펜타곤에서 핵무기 지휘 통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ARPA에 과제를 할당했다고 생각하였다.

 

Brown은 그의 부하 중 한 명이었던 벨 연구소의 수학자인 Robert Prim의 영향을 받았다. Prim은 핵무기의 나중에 핵무기 보안 장치 (Permissive Action Links, 발사 허가 링크)로 발전하는 연구를 포함하여, 핵무기의 지휘 통제에 관련된 기술 개발에 집중하고 있었다. Brown은 군대의 기술 발전 속도에 불만이 많았다. 그래서 그는 지휘 통제 연구를 ARPA에게 의뢰하면서, 보다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를 희망했다.

 

1962년 가을 핵무기 통제 능력을 더 강화시켜야 할 필요성이 더 커졌다. 연구에 착수하고 몇 주도 지나지 않아, Licklider는 버지니아주 Hot Springs에서 열리는 지휘 통제 시스템에 관한 공군 지원 회의에 참석하였다. 이 회의의 주요 의제는 쿠바 미사일 위기였다.

 

그러나 회의에서는 그다지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워싱턴으로 돌아오는 열차에서 Licklider MIT Robert Fano교수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고 조만간 열차에 있던 다른 컴퓨터 과학자들도 참여했다. Licklider는 이를 자신의 구상을 현실로 옮길 기회로 활용했다. 더 나은 지휘 통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는 완전히 새로운 인간과 기계의 상호작용을 위한 틀이 필요했다.

 


Licklider는 핵무기의 지휘와 통제에 대한 펜타곤의 관심을 잘 알고 있었다. 컴퓨터 네트워킹에 대한 그의 초기 제안 중 하나는 핵무기를 통제하는데 사용할 초기 군용 지휘 시스템에 서로 링크된 컴퓨터를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구상은 더 광범위한 것이었다, ARPA의 책임자인 Jack Ruina Brown의 부하 중 한명인 Eugene Fubini를 만났을 때 Licklider는 상호작용하는 컴퓨팅 기술을 그들에게 시연하였다. 지휘 및 통제 기능을 향상시키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컴퓨터로 작업하는 방식 전체를 바꾸고 싶었던 것이다. Licklider는 이렇게 물었다. ‘전투 중에 프로그램을 일일이 새로 작성해야한다면, 어떻게 전투를 지휘할 수 있겠습니까?’

 

새로운 ARPA의 연구 관리자는 그의 구상이 단순한 핵무기 지휘 통제용 컴퓨터를 만드는 것보다 더 뛰어난 무언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펜타곤의 관계자들에게 납득시키고자 노력했다. 펜타곤의 관계자들이 핵무기 지휘 통제에 관해 물어볼 때 마다, Licklider는 대화를 상호작용 컴퓨터로 전환했다. ‘국방장관실의 관계자들이 제가 지휘통제실을 만들기 위해 일하고 있다고 생각 한다 느꼈죠, 그러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저는 상호작용 컴퓨팅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결국에 그들은 제가 원래부터 상호작용 컴퓨팅에 관련된 일을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단 느낌이 들었습니다.’

 

펜타곤의 관계자들은 사실 Licklider가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꽤나 흥미로운 제안이었고, Ruina가 동의하였듯, 최소한 Licklider는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러면 더 이상 디테일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국방장관이 그에게 할 말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와서 이야기 하라고 말했지만, Licklider는 절대 컴퓨터 과학에 대해 면담을 요청하지 않았다. 대신 탄도미사일 방어 혹은 핵실험 탐지에 대해 면담을 요청하였다. 어쨌거나 당시 그것은 매우 큰 이슈였다. 그리고 Licklider의 작업은 이 문제에 딸린 작고 흥미로운 프로그램이었다.

 

Licklider의 전략은 나쁘지 않았다. 설립된지 얼마 안 된 젊은 기관에서, Licklider와 같은 신참들은 자유분방한 문화를 창출하였고, 관리자는 이들에게 보다 거대한 펜타곤의 목표에 더하여 같이 추구할 수 있는 연구개발 프로그램을 확보해 주었다. 그가 발주한 야심찬 프로젝트는 이름하여 Project MAC였는데 MAC Machin-Aided Cognition 혹은 Multiple-Access Computer의 약자였다. Project MACMIT가 담당했는데 예산은 2백만 달러에 달했다. Project MAC의 연구 대상은 상호작용 컴퓨팅 기술에 관련된 것이었는데, AI와 그래픽에서부터 시분할과 네트워킹기술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하였다. ARPA는 제시한 목표에 관련되어 있는 한 MIT에게 예산 사용에 대한 자율권을 전적으로 부여했다.

 

Licklider는 명성보단 그의 구상을 현실화하는데 더 관심이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스탠포드 연구소의 Doug Engelbart같은 연구원들에게도 베팅을 걸었다. 어쨌거나 그는 미국 전역의 뛰어난 연구원들을 모두 섭외하였고, MIT, 버클린, 스탠포드, 스탠포드 연구소, 카네기 연구소, RAND 연구소 그리고 System Development Corporation 같은 유수의 기관들이 모두 망라되어 있었다.

 

1963 4LickliderARPA에 합류한지 6개월 정도 지났을 무렵, 그는 그가 자금을 지원한 기관들에게 6페이지 분량의 메모를 보냈다. 그리고 이 메모는 그가 ARPA에서 일한 기간에 남긴 문서 중 가장 유명한 것이기도 했다. 그는 ARPA가 자금을 지원한 기관과 연구원들에게 그들이 공동의 목표를 위해 일하는 보다 광범위한 조직의 일원임을 알리기 위해 장난스럽게 이들을 다음과 같이 칭하며 서한을 보냈다. ‘은하계 컴퓨터 네트워크를 위한 멤버 여러분들께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 문제는 본질적으로 이미 SF 작가들이 다루었던 문제입니다. ‘서로 관련이 없는 지적 존재들 사이에서는 어떻게 대화를 시작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겐 통합된 네트워크를 작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하는 것은 꽤 중요하면서도 흥미로운 것으로 느껴집니다. 만약 제가 희미하게 구상하고 있는 것과 같은 네트워크를 구현해 내는데 성공한다면 우리는 아마 최소한 4대의 대형컴퓨터 혹은 6, 8대 정도의 컴퓨터들과 대규모의 디스크 파일 그리고 마그네틱 테이프를 서로 연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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