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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가 우리의 생각을 바꾸지 못하는 이유

category # 생 각 들 2017. 3. 1.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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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스탠포드 대학의 연구진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자살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연구진은 대학생들에게 자살자의 한 쌍으로 이루어진 유서들을 보여주었다. 이 한 쌍의 유서에서 하나는 진짜 자살자의 유서였고 다른 하나는 무작위로 선정된 사람이 쓴 가짜 유서였다. 연구진은 대학생들에게 이 중 진짜 유서가 어떤 것인지 구별해보라고 하였다. 


어떤 학생들은 이 구별을 매우 잘 해냈다. 25번의 시도에서 24번이나 진짜 유서를 구별해낸 것이다. 반면 다른 학생들은 겨우 10개중에 하나만 구별해냈다. 


심리학 연구에서 종종 그러하듯이 이러한 상황은 조작된 것이었다. 물론 유서의 절반은 LA 의 검시관에게서 제공받은 진짜 유서였지만, 학생들이 유서를 구분해낸 점수는 가짜였다. 높은 점수를 받은 학생이나 낮은 점수를 받은 학생이나 실제 유서를 구분하는 것에 큰 차이점은 없었다. 


이 연구의 두 번째 단계에서, 연구원들은 학생들에게 점수가 가짜였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실험의 진짜 목표는 그들이 옳거나 그르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반응을 측정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 역시 실험을 위해 학생들을 속인 것이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실제로 본인이 얼마나 많은 점수를 얻었을 것 같으냐 물어보았다. 그 대답은 꽤 흥미로웠는데, 처음에 고득점을 받았다고 들은 학생들은 실제로 본인이 평균 보다 훨씬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낮은 점수를 맞았다고 들은 학생들은 평균보다 훨씬 낮은 점수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두 그룹의 처음 점수는 완전히 무작위로 주어진 것이었다. 


이에 대해 연구원들은 “일단 첫 인상이 결정되면, 이 인상은 잘 바뀌지 않는다.”고 평가하였다. 


몇 년 후, 스탠포드 대학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또 연구를 진행하였다. 학생들에게 Frank K와 George H라는 소방관의 정보를 보여주었다. Frank의 약력에는 그에게 어린 딸이 있다는 것과 스쿠버 다이빙이 취미라는 것이 기록되어 있었다. 반면 George는 골프를 즐기며 어린 아들이 있다고 적혀 있었다. 또 기록에는 연구원들이 위험 보수성 성향 테스트라 부르는 테스트 기록이 포함되어 있었다. 연구원들이 실험대상에게 2가지 버전의 이 테스트 기록을 보여주었는데, 첫번째 버전에선, Frank는 언제나 안전한 방법을 선택하여 성공적인 소방관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평가한 반면, 다른 버전에서는 Frank가 역시 언제나 안전한 방법을 선택하지만, 상관에게 여러 번 ‘지적’받은 저성과자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앞선 연구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연구원들이 실험 중간에, 그들에게 알려준 정보는 가상으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고 나서 연구원들은 위험에 직면했을 때 훌륭한 소방관은 어떠한 태도를 보일지에 대하여 본인들의 생각을 말해 달라고 하였다. 첫 번째 버전을 받은 학생들은 위험을 피해야 한다고 말했고, 두 번째 버전을 받은 학생들은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자신의 의견을 완벽하게 반박하는 명백한 증거가 있어도,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수정하는데 실패했다. 위 두 번의 실험 결과로 일반화하기는 충분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실패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스탠포드 대학의 연구는 곧 유명세를 탔다. 사람들이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가에 대한 논쟁은 1970년대 학계에서 상당히 큰 쇼크였다. 이에 대해 수천 번의 실험과 연구가 이루어졌고 스탠포드 대학의 연구가 옳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합리적인 사람들도 종종 완전히 비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을 확인했다. 충격적인 미국 대선의 결과를 눈앞에서 목격한 지금 이 연구결과는 다시 주목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중요한 질문이 남아있다: 어떻게 우리가 이런 판단을 내린 것일까?


인지과학자인 Hugo Mercier와 Dan Sperber는 새 책 “The Enigma of Reason”에서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았다. Mercier와 Sperber는 이족보행이나, 3색형과 마찬가지로 이성은 진화의 산물이라고 지적하였다. 이성은 인류가 아프리카 사바나에 살던 시절부터 발생한 것이며,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인지과학의 분야에 속하는 많은 것들을 제외한다면 Mercier와 Sperber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다른 종들과 비교한 인간의 가장 큰 장점은 우리의 협동능력에 있다. 모든 개인에게 최선의 행동방침은 남에게 공짜로 얻어먹는 것이다. 이성은 논리적인 문제를 해결하거나, 낯선 정보에서 어떤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 개발된 것이 아니라 협동적인 그룹 안에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발전된 것이다. 


Mercier와 Sperber는 이성은 극도록 사회적인 필요로 인해 진화한 것이라 주장한다. 지적인 관점에서 볼 때 완전히 멍청해 보이거나 이상한 행동도 사회적 “상호작용”의 관점에서 보면 의문이 풀릴 수 있다. 



많은 잘못된 사고방식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것은 “확증 편향”이다. 확증 편향은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는 믿음에 부합하는 정보는 받아들이지만 그렇지 않은 정보는 거부하는 사람들의 심리적 경향을 의미한다. 가장 잘 알려진 실험은 이번에도 스탠포드 대학의 연구이다. 이 연구에서 연구원들은 학생들을 모집했다. 그 중 절반은 사형제도에 찬성하며, 범죄 억제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지만, 나머지 절반은 사형제도에 반대하며, 범죄억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연구원들은 학생에게 2가지 연구를 보여주었다. 하나는 사형제도의 효용성에 대한 자료를 보여주었지만 다른 하나는, 사형제도의 효용성에 의문을 표하는 자료였다. 예상했겠지만 이 두 자료 모두 억지로 꾸며낸 것들이었다. 원래부터 사형 제도를 지지했던 학생들은 범죄 억제에 효과가 있다는 데이터에 대해 높은 신뢰감을 보이며 반대되는 데이터에 대해 의심을 표하였다. 반면 원래부터 사형 제도에 반대했던 학생들은 정확히 그 반대의 반응을 보였다. 실험이 끝날 무렵, 연구원들은 다시 한 번 사형제도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원래부터 사형 제도에 찬성한 학생들은 더 열렬히 사형제도에 찬성을 표했으며, 반대했던 학생들 역시 더 적극적으로 사형제도에 반대의사를 표하였다. 


만약 이성이 건전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 발전된 진화의 산물이라면, 이런 확증 편향은 일어나선 안 된다. Mercier와 Sperber는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는 생쥐를 가정하였다. 이 생쥐가 “주변에 고양이가 없다는 믿음에 확신을 가지게”되면 이 생쥐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고양이의 저녁식사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확증 편향으로 인해 사람들이 새롭게 발견된 징조를 무시하거나 위협을 과소평가하게 될 정도라면 이는 진화과정에서 살아남지 못할 특성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런 특성은 반드시 어떤 존재 이유가 있을 것이고, Mercier와 Sperber는 그 이유가 우리의 “초(超)-사회성”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Mercier와 Sperber는 “아전인수 편향성”이란 용어를 선호하는데, 인간이 무작정 잘 속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시피 우리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찾아내는 것엔 매우 능숙하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어렵다. 


Mercier와 유럽의 과학자들이 수행한 최근의 실험은 이 비대칭에 대한 깔끔한 설명을 내놓았다. 참가자들에게 일련의 간단한 추론 문제에 대답해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참가자들은 자신의 대답에 대해 설명을 하며, 실수를 발견하면 이를 수정할 수도 있었다. 대다수의 참가자들은 원래 본인의 선택에 대해 만족하였고, 15% 미만이 수정을 하였다. 


그 다음단계에서, 참가자들에게 같은 문제에 대해 다른 결론을 내린 다른 참가자의 대답을 보여주었다. 다시 한 번, 참가자들에게 대답을 수정할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속임수가 있었다. 다른 사람의 대답이라며 보여줬던 것은 사실 본인들 것이었다. 참가자의 절반정도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깨달았다. 나머지 절반은 갑자기 더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거의 60퍼센트에 이르는 사람들이 그 전까진 만족했던 대답을 바꾼 것이다.


Mercier와 Sperber에 따르면 이런 현상은 진화과정에서 이성이 어떤 일을 수행했는지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성은 우리가 무리의 다른 동료들로부터 따돌림 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진화하였다. 수렵-채취사회의 소규모 그룹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의 선조들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중요시 여겼다. 그리고 목숨을 걸고 사냥하는 동안 다른 동료들이 동굴에서 뒹굴거리면서 놀고 있지 않기를 원하였다. 이성에서 얻을 것은 별로 없는 반면 논쟁에서 이기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 선조들은 사형의 범죄 억제 효과나 소방관의 이상적인 태도에 관한 것들에 대해서는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조작된 연구, 가짜 뉴스 혹은 트위터 따위와 싸울 필요도 없었다. 이것이 오늘날 이성이 우리를 왜 종종 실패하게 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Mercier와 Sperber가 말한 것처럼 “자연 선택이 따라잡기에는 우리의 환경이 너무나 빨리 변했다.”


Brown 대학의 교수인 Steven Sloman과 Colorado 대학의 Philip Fernbach 역시 인지과학자이다. 그들은 사교성이 사람의 생각이 기능하는 방법 혹은 오류를 일으키는 이유를 이해하는데 핵심이 된다고 생각한다. 공동저서인 The Knowledge Illusion: Why We Never Think Alone을 화장실에 대해 설명하면서 시작한다. 


미국과 다른 선진국의 국민들은 화장실에 익숙하다. 일반적인 수세식 화장실엔 물로 가득 찬 도자기로 만들어진 변기가 있다. 손잡이를 누르거나 버튼을 누르면 물과 용변들이 하수도와 연결된 파이프를 따라 내려간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예일 대학교에서 실시한 연구에서 대학생들에게 화장실, 지퍼, 실린더 자물쇠와 같은 일반적인 장치들에 대한 이해도가 얼마나 되는지를 물었다. 그 후 학생들에게 그 장치들이 정확히 어떻게 작동하는지 하나하나 차례대로 기술할 것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이해도에 대해 다시 물었다. 그리고 이렇게 자세한 설명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면 본인의 무지함에 대해 깨닫게 된다.(화장실은 보기보다 굉장히 복잡하다.)


Sloman 과 Fernbach는 “설명 깊이에 대한 망상”이라 알려진 이 현상이 인간 사회에 만연하다 보았다. 사람들은 본인이 실제로 알고 있는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이렇게 믿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있는 덕분이다. 화장실의 경우에 다른 사람이 설계했기에 우리가 쉽게 사용 할 수 있다. 이게 바로 인간이 아주 잘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함께 사냥하는 방법을 알아 낸 이래로 서로의 전문지식에 의존해왔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의 진화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발전일 것이다. Solman과 Fernbach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협동 능력 덕분에 우리 자신의 지식과 이해가 끝나는 부분과 다른 사람들의 지식과 이해가 시작되는 경계선을 딱 잘라 구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경계의 흐릿함 혹은 혼돈은 진보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할 때 매우 중요하다. 사람들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위한 새로운 도구를 발명하면 또 하나의 새로운 무지의 영역이 발생한다. 만약 칼을 만들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금속공학에 대해 정통해야 했다면, 청동기 시대는 결코 오지 않았을 것이다. 신기술에 관해서는 불완전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Solman과 Fernbach에 따르면 우리를 곤경에 빠뜨리는 곳은 정치적 영역이다. 화장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지 못한 채 사용하는 것도 그렇지만, 이민 금지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찬성 (혹은 반대) 할 수 있는지가 문제이다. Solman과 Fernbah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합병한 2014년에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미국인들에게 이 사태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물었으며 동시에 우크라이나가 지도상에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지목해달라 요청하였다. 설문 조사 결과는 지도상의 위치에서 먼 곳을 찍은 사람일수록 군사적인 개입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리고 응답자들은 평균적으로 약 1800마일 정도 먼 위치를 지목했는데 이는 거의 키예프에서 마드리드 사이의 거리와 비슷하다.) 


“이로 인해 지식 공동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Soloman과 Fernbach는 그들 나름대로 화장실 실험을 다시 해보았다. 이번에는 일상용품 대신에 사회정책에 대한 질문을 하였는데, 2012년 연구에서 연구원들은 사람들에게 오바마 케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은 교사들에게 성과 연봉제를 실시하는 것에 찬성하십니까? 와 같은 질문에 대한 생각을 물어보았다. 참가자들은 이 주제에 대해 얼마나 동의하는지 1점에서 10점까지 점수로 표현한 후에, 이 정책이 미칠 영향에 대해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해야 했다. 앞선 실험들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이 단계에서 참가자들은 좌절감을 느꼈다. 다시한번 얼마나 동의하는지 물어본 결과 찬성과 반대 모두 대답이 좀 온건하게 바뀌었다. 


Solman과 Fernbach는 이것이 작은 희망이라 여겼다. 만약 우리가 어떤 문제에 대해 좀 덜 거들먹거리는 대신 좀 더 많은 시간을 정책의 의미와 효과에 대해 연구한다면, 아마 우리가 얼마나 그 문제에 대해 아는 것이 적은지 알게 될 것이며, 우리의 태도도 좀 더 완만해질 것이다. 저자들은 “이런 사고 방식이 ‘설명 깊이에 대한 망상’을 깨트리고 사람들의 태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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