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슘페터와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category # 감 상 문/#2 기타 2017. 7. 30.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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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황혼과 슘페터



조세프 슘페터


조세프 슘페터는 체코출신의 경제학자이다. 정확히 말하면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에서 오늘날의 체코에 있는 트리슈라는 지방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그가 4살 때 아버지가 사냥 중 사망을 하였지만 어머니는 시골에서 남은 생활을 보내기 보다 기회를 찾아 시골에서 벗어나 대도시인 그라츠로 이사를 했다.

 

그라츠에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몇 개 없었던 대학 중 하나인 그라츠 대학교가 있었고. 어머니는 이곳에서 아들을 위한 좋은 기회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곳에서 슘페터의 어머니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퇴역장성이자 귀족출신인 지그문트 폰 켈러와 재혼을 하였고 그 덕에 슘페터 모자는 제국의 정치, 행정, 문화, 경제의 중심지였던 수도 빈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빈에서 슘페터는 귀족학교이자 최고의 초, 중등 교육기관인 테레지아눔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중등교육을 받고 1901년 빈대학교 법학부에서 대학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찬란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을 향해가고 있었던 빈은 당시의 세계의 급격한 변화에서 뒤떨어져 있었고 어떤 부분에서는 최전선에 있기도 했다.

 

서유럽과 미국에서 상공업이 급격하게 발전하며 내연기관을 중심으로 한 2차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오스트리아 제국은 아직도 대다수의 농민들이 중심이었으며 소규모 상공업자들은 주변국가들과의 경쟁에서 조금씩 도태되어가고 있었다. 반면, 합스부르크 왕가의 결혼정책을 통해 탄생된 거대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수많은 이민족들이 함께 살던 국가였다.

 

비엔나의 석양끝을 향해 가고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비엔나


그 어느 때보다 인종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쓰던, 민족주의가 불타오르던 시기에 제국은 게르만, 슬라브, 라틴, 유대인까지 포함되어 그 어느 나라보다 민족주의의 압력의 최전선에 놓여있었다. 이러한 번영과 혼란의 빈에서 공부를 하던 슘페터는 경제적 변화에 대한 관심을 점점 더 크게 가지기 시작했다. 테레지아눔과 빈대학교에서 느끼고 얻을 수 있었던 사회변화 그리고 경제환경의 변화에 관한 최신정보들은 슘페터의 이후 학자로서의 활동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가 빈대학교의 법학부에 입학한 것은 당시 대부분 유럽의 대학교에서 그렇듯 경제학과가 법학부에 속해있었기 때문이다. 빈 대학은 오스트리아 학파로 대변되듯이 경제학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대학이었고 이곳에서 슘페터의 경제학자로서의 재능이 꽃피기 시작한다. 졸업과 동시에 몇 개의 인상적인 논문을 작성하여 학계의 주목을 받았었지만 귀족의 아들로서 살아온 날들에서 그의 씀씀이에 걸맞은 직업을 찾기는 어려웠고 그 당시 대부분의 귀족출신의 젊은이가 해왔던 것처럼 유럽여행을 떠난다.

 

슘페터는 독일 베를린대학교 프랑스 소르본 대학교 영국 정경대학교, 옥스포드 대학교 등에서 공부를 하며 인맥을 쌓았다. 그 와중에 연상의 영국 상위층의 여성인 글래디스와 결혼을 했고 직업을 얻기 위해 영국의 보호령이었던 이집트의 카이로로 건너가 변호사로 활동하며 동시에 이집트 총독의 딸의 재정을 관리하고 투자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그리고 이시기에 슘페터의 첫 번째 저작인 <이론경제학의 본질과 주요내용>을 발표한다.

 

이 책은 학계에서 그다지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하였지만 그는 이후 빈으로 돌아와 교수 자격을 얻고 체르노비츠 대학이라는 설립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조그만 지방 대학교에 조교수로 취임했다. 그리고 이곳에 머무는 2년동안 <경제발전의 이론> 이라는 기념비적인 책을 썼다.


경제발전의 이론



기업가 정신을 다룬 이 책에서 슘페터는 경제 발전의 원동력은 기업가 정신과 이들이 만들어낸 혁신 그리고 이를 통한 새로운 시장의 창조라는 새로운 주장을 내어놓았다. 이 책이 아직 세상에 나오기 전, 그러니까 그가 명성을 얻기 전에 슘페터는 체르노비츠를 떠나 그라츠 대학교에 정식교수로 채용되어 옮기게 된다.

 

교수로 지내는 동안 전임 경제학교수를 비판하였고 과도한 과제를 내주는 바람에 학생들한테 최초로 보이콧을 당하기까지 한 그라츠 생활이었지만 경제발전의 이론을 통하여 명성을 얻은 그는 미국 콜럼비아 대학교에 교환교수로 갈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주어지기도 했다. 미국에서도 명석한 두뇌 그리고 훌륭한 교수 실력 덕분에 빠르게 자리를 잡은 슘페터는 이미 30살의 나이에 콜럼비아 대학교 명예교수직까지 얻으며 미국생활에 적응을 하였다.

 

빠르게 성장하는 미국에서 그가 생각하였던 경제발전의 원동력과 기업가 정신을 다시 한번 확인한 그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하여 깊은 인상을 받았고 1914년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그는 이미 경제학계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라갔다. 단 한가지 문제는 유럽은 지금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조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1차대전에서의 패배로 6개의 국가로 공중분해 되었으며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던 오스트리아는 조그만 약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전쟁기간중에 그는 그라츠 대학의 유일한 경제학 교수로서 징집을 면제받았으며 전쟁의 혼란기임에도 불구하고 몇 개의 인상적인 논문을 작성할 수 있었다. 전후 성립된 오스트리아 제 1공화국에서 그는 재무부장관직을 역임하며 전후 오스트리아 경제의 부흥을 위해 노력했지만 주변여건도 매우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었으며 특히 그에게는 정치적인 재능이 없었기에 그의 공직기간은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만다.

 

공직에서 물러난 후 내각의 배려로 그가 은행 일을 맡도록 허가해 주었다. 빈에서 가장 오래된 민간은행인 비더만 은행과 동업을 하고 사장자리 그리고 수많은 사외 주들을 증여 받아 경영권을 행사하게 되면서 그가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경제성장을 위한 사업가정신 그리고 혁신을 지원하기 위하여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나름대로 성공적이었지만 24년 발생한 빈의 주식시장 폭락 때 모든 재산을 날리고 빚더미 위에 앉게 된다.

 

이러한 절망 속에서 그를 구출한 것은 다시 학문으로의 복귀와 사랑이었다. 전쟁 중 영국에 있던 아내와의 사랑이 식어버리고 20살 연하의 그의 새로운 연인 애니와 재혼을 하였으며. 마르크스가 신입생 생활을 보내었던 독일의 본대학교로 이주하여 새로운 교수 생활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바로 다음해인 1926년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갓 태어난 아들을 모두 잃는 슬픔을 겪게 되고 이때를 기점으로 그는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훨씬 사려 깊고 신중해졌으며 그가 가진 재능들을 하나 둘 계발해 나가기 시작한다. 자본주의와 인간이 사는 사회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어가기 시작하며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이후 또다시 하버드 대학교에 교환교수로 갔다 오기도 하면서 독일에서 꾸준히 연구활동에 매진하던 그는 세계대공황과 독일에 닥치고 있는 거대한 정치적 변화를 목도하면서 해결책을 내놓기 위해 꾸준하게 노력했다. 다만 그 역시 그 당시 많은 사람들처럼 독일의 경제적 피폐가 가져올 공산주의나 파시즘 혹은 급진좌파 운동가들의 선동을 두려워했지 히틀러라는 미치광이가 독일의 정권을 잡게 될 줄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무튼 그는 독일에서 경제학자로서 또다시 최고의 자리에 오르지만 베를린에서 제공할 것이라 생각했었던 명예 즉, 관직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자 1932년 슘페터는 독일을 등지고 미국으로 망명함과 동시에 하버드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하버드 대학교에서 슘페터는 글쓰기와 강의 두 개의 업무를 모두 좋아하고 또 잘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뛰어난 교수였다고 한다. 하버드에 머물면서 화폐의 본질’, ‘경기 순환론과 같은 뛰어난 저작을 출판하거나 탈고했으며 1933년 히틀러가 독일에서 정권을 잡으면서 박해한 유대인 학자들을 미국으로 망명시키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자주 유럽으로 강연을 다녔고 또한 슘페터는 20대 후반의 미아라는 유럽 여성과 연애를 즐기며 활기찬 삶을 보냈다. 여기서 말하자면 슘페터는 젊은 시절부터 매력적인 사내로 많은 여성들의 사랑을 받았고 본인도 그것을 즐겼다고 하는데 그는 늘 멋있게 연애하고 승마의 명수가 되고 위대한 경제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세가지 소망 중 둘만 이루었다고 말하곤 했다.

 

슘페터와 부인 피루스키슘페터와 세번째 부인 엘리자베스 부디 피루스키


그의 연애사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다시 하버드대 경제학부 대학원생 출신인 경제학 박사 이혼녀 로메인 엘리자베스 부디 피루스키를 만나 3번째 결혼에 성공하고 이 마지막 결혼에서 그는 꽤 만족 했다고 한다.

 

1942년 슘페터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가 출간되어 경제학자로서의 정점에 도달하며 1950년 사망할 때까지 미국계량경제학회 회장, 미국경제학회 회장, 국제경제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말년까지 활발한 활동을 한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를 슘페터는 사회경제학 저술이라고 말하였는데 이는 오늘날의 구분에 따르면 정치경제학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고 한다. 경제적 요인과 비경제적 특히 사회적 요인 사이의 상호 영향에 남다른 주의를 기울여서 서술하였으며 자본주의에 대하여 경제 사회 문화 정치의 다각도에서 살피고 있으며 동시에 이들이 서로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설명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자본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민주주의

 

그가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시각은 기존의 고전경제학에서 시작한다. 부르주아는 돈을 보고 사업을 한다. 자본주의는 성공한 자에게 많은 돈을, 뛰어난 자에게는 더 많은 돈을 벌 기회를 준다.

 

기업가의 능력과 의욕을 끌어내기에 최적화된, 그래서 자본주의에 속한 체제는 지속된 성장을 이루고 부르주아가 아니더라도 높은 생활수준을 누릴 수 있다. 슘페터는 기존 경제학에서 기업들을 비인격적으로 경쟁하는 시장이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슘페터가 보기에 이러한 경제를 부흥시키는 것은 고전 경제학에서 상정하고 있는 무한경쟁의 소규모 기업들이 아니라 시장에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독점적으로 경쟁하는 대기업이다.

 

이와 같은 논리를 슘페터는 있을법한 자본주의의 세계를 가정한 후 펼친다. 이 세계에서는 대기업들이 주요 산업들을 독과점하며 이러한 기업들에 의해 통제가 된다. 고전경제학에서는 독과점이 발생하면 자원의 비효율적인 배분을 가져온다고 걱정하지만 이런 걱정에 대한 해답으로 슘페터는 그 유명한 창조적 파괴를 제시한다.

 


창조적 파괴



경제체제의 효율성은 단기적인 성과가 아니라 장기적인 성과를 바탕으로 평가해야 한다.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어떻게 장기적인 성과와 안정성을 가져올 수 있을까? 슘페터는 자본주의 체제가 계속해서 성장하는 원동력은 기업이 창조하는 끝없는 새로운 시장이라고 믿었다.

 

낡은 구조를 파괴하고 새로운 구조를 창조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가 성장하는 원동력이다. 이러한 파괴와 건설을 가능케 하려면 기업이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상품화를 해야 한다. 하지만 고전경제학에서 말하는 무한경쟁체제 아래 놓인 소규모 기업들은 이것이 가능할까?

 

앞서 말했듯이 슘페터가 빈에서 듣고 느낀 것은 서유럽과 미국에서 등장하는 거대 기업들이 소식이었다. 독일의 티센크루프 바스프 미국의 아메리칸 토바코, US Steel 등 새로운 기술 혁신을 통하여 거대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이들 기업에서 자본주의의 힘을 찾은 것이었다. 이와 같은 대기업들은 혁신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과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창조적 파괴창조적 파괴


독점이라는 방어막 뒤에 숨은 기업가들은 창조적 파괴의 영속적인 강풍이라 불리는 혁신 경쟁에서 새로운 경쟁자에 따라 잡히지 않기 위하여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가지고 있는 자원을 이용하여 기술개발과 혁신에 나서 자본주의가 장기적으로 지속적인 성장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슘페터가 바라본 구속받지 않는 자본주의의 모습이다.

 

하지만 슘페터는 자본주의가 영원할 것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물론 위와 같은 경제체제는 슘페터가 생각하기에 매우 잘 작동한다. 자본주의는 그 스스로가 투자기회를 창조할 수 있고 운신의 입지만 주어진다면 자본주의의 엔진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본주의 체제가 무너지는 원인은 역설적으로 자본주의가 성공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혁신이 고도화됨에 따라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자원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 기업가나 자본가 계층이 이를 담당하기 보다는 조직화된 관료집단이 이 역할 맡게 되는 것이다. 혁신이 모험이 아니라 일상이 되면 이제 개인이 아닌 체제가 기능을 하며 개개인의 기업가는 이제 경제적 진보를 유지하는데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된다.

 

또한 자본주의의 성장에 필요했던 과정인 체제에 대한 합리적인 의심, 교황을 의심하고 왕을 의심하며 구체제를 의심했던 이러한 합리적 의심이 이젠 기업가에게 까지 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동시에 표현의 자유가 확대되며 교육을 받은 지식인 집단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면서 이제 자본가 계급은 더 이상 혁신의 전도사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단기적 모순 즉, 회사가 도산하고 실업이 발생하는 이러한 모순의 원흉으로 지목 당하여 대중으로부터 배척 받게 된다.


부르주아지 내부에서도 자본주의가 성숙하면서 자본가 계급의 이윤동기의 근본인 가정이 해체되면서 외부적으로 그리고 내부적으로 그 원동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어 붕괴되고 말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자본주의가 급격하게 붕괴되는 것은 아니다.


 


생산수단의 중앙 집권적 관리



자본주의의 부르주아 계급이 붕괴되면 이들을 밀어낸 세력이 이제 그 역할을 하게 된다. 슘페터는 사회주의의 정의를 생산수단을 공공권위에 의해 중앙 집권적으로 관리되는 체제라고 설명하였다.

 

생산수단은 사유화되어도 통제는 중앙에서 하거나 혹은 소유와 통제권이 모두 국가에게 있는 체제를 말한다. 다시 말해 최초의 개인기업가들이 경쟁을 통해 거대기업을 이루면서 고도 자본주의 체제가 들어서면 시장에서 성패를 가려 경제적 지도자를 양성하였던 과거와 달리 이제 기업 조직 내에서 성과를 기준으로 선발되는 관료적 관리자가 기업을 운영할 것이다.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는 이러한 상황에 이르게 되면 공공의 관료조직이 기업의 운영권을 가지게 되는 슘페터식 사회주의와 다를 것이 없다.

 

공적 관리자가 사적 관리자에 비해서 더 유리한 것은 권위적인 규율을 사용하는데 용이하며 정부의 정책에 대한 반대가 사라지며 경제적 필요들이 정책결정에서 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물론 여기에 필요한 것은 이러한 업무를 실제로 담당하는 관료기구들이 나름의 원칙들을 개발하고 그것을 펴 나갈 만큼 충분히 독립적이어야 하며 관료기구는 그 자체로 나름의 권력이어야 한다’.

 

, 정치인과 각종 시민단체 그리고 노동자로부터 자유로워야 과거 자본가들이 누렸던 구속 받지 않는 자본주의에서처럼 경제활동을 조직하고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독재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가 나타난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에서 나타난 슘페터의 주요 논지는 지금까지 설명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이렇듯 자본주의의 붕괴와 사회주의의 등장이 필연적이라면 그 와중에 민주주의는 어떻게 될지를 예측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는 사회주의가 등장한다고 해서 이를 걱정하는 사람들 말처럼 민주주의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민의 의지는 정치과정의 산물이지 추진력이 아니다



민주주의민주주의란 올바른 정치지도자를 선택하는 제도?


그는 민주주의에 대한 고전적인 견해를 비판하면서 논지를 편다. 민주주의에 대한 고전적인 정의는 민주적인 방법이란 어찌 보면 링컨이 말한 민주주의와 비슷하다. 인민의, 인민을 위한, 그리고 인민에 의한 결정을 내려 공동선을 실현하는 정치적 결정에 도달하려는 제도적 장치, 이것이 슘페터가 말한 고전적 의미의 민주주의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생각은 먼저, 공동선이 무엇이며 어떤 것이 사회에 최고의 이익이 되는지 또 어떠한 방법으로 해나가는 것이 올바른지를 합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 하며 또한 인민들의 결정이 상향식으로 올라가 정책으로 발현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이 실질적으로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이러한 의미에서 슘페터는 <인민의 의지는 정치과정의 산물이지 추진력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즉 정치과정이란 정치지도자들이 시민들의 의지를 형성하고 계도하기도 하면서 시민 개개인의 이해관계를 벗어난 공익을 위한 결정을 함에 있어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란 인민들이 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결정을 내려줄 올바른 지도자를 즉, 정치지도자를 선택하고 교체하는 제도를 뜻한다.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간접민주주의랑 비슷한 견해라 보인다.

 

모든 사람들은 정치지도자에 도전할 수 있으며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선거를 통해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제도도 약점은 있. 선거에 승리하기 위해 단기적이고 지엽적인 이익에만 호소하는 선동정치 등이 그 예이다.

 

이러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1. 충분히 많은 유능한 정치가 


2. 중요한 결정이 유권자나 정치인의 단기적인 관심에 의해 좌우되지 않도록 정치적 결정의 범위를 제한하며 


3. 잘 훈련된 존경 받는 관료가 있어야 하며 


4. 시민들도 정부가 실수할 때 마다 즉각적으로 비판하기 보다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주는 민주적 자기통제를 행사해야 하고 


5. 사회전반적으로 이견에 대한 관용의 정도가 높아야 한다. 그리고 이견에 대한 관용도가 높으려면 경제조직 등의 원칙을 포함해서 사회의 기본 구조적인 원칙에 대한 일반적인 합의가 필요하다.  

 

그는 당시 사람들이 걱정하고 두려워하던 것처럼 사회주의가 곧 공산주의 일당독재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회주의 자체는 경제체제로서 민주정, 절대군주정과 귀족정과도 결합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내재적인 모순을 극복하려면 그 답은 사회주의로의 전환과 민주주의와의 결합이라고 말하였다. 자본주의는 그 태생이 사회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이었다


자본주의의 앞길을 막고 있는 구제도들과 조직들에 대한 합리적인 의심으로 장애물들을 걷어냈으며 이제 고도화된 자본주의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성장한 노동자들과 지식인들이 자본가들에 대한 합리적인 의심을 가지게 되면 이를 막을 수 있는 보호막은 과거 자신이 모두 제거해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없을 것이라 보았다. 민주주의의 확산과 이에 따른 투표권의 확산은 노동의 탈 상품화를 가져왔다.


이를 억제하기 위해 자본가 계급이 유화 정책을 쓰면 자본주의의 지속적 성장에 필요한 자본의 축적을 방해하며 재투자의욕을 손상시킬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의 고도화로 개인기업이 아니라 거대 기업이 시장을 장악함에 따라 과거 기업가들이 담당하고 있었던 혁신이 이젠 관료화된 조직들에 의해 이루어지며 이로 인하여 혁신이 일상화되어 기업가 계급의 잉여화가 발생한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



경제에 대한 정치적인 간섭이 지속될 것이며 이들의 서로 상충되는 원리 때문에 그리고 비자본가 계급의 정치적 성장 때문에 이와 같은 간섭은 필연적으로 경제성장에 대한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갈등은 자원을 지속적인 혁신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보호를 위하는데 전용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 기업들은 법정싸움에 정치는 세금을 거둬들이기 위한 거대한 행정기구를 형성하여 이와 같은 모순된 형태가 지속된다면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은 앞서 말한 정치와 경제가 분리된, 그래서 행정관료가 경제정책을 운영하는 사회주의로의 전환이 나타날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그 이익은 생산수단의 소유자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이를 국가조직 자본주의로 불러도 적절할 것이다.

 

경제에 대한 정치의 과부하를 막기 위한 절차적 의미의 민주주의와 결합하게 되며 이는 앞서 말한 민주주의의 조건에 의해 유지된다.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자는 일단 국민들의 선거에 의해 선출되기에 이들의 마음을 잡기 위하여 경쟁을 해야 하지만 일단 선출된 이후에는 경제에 가해지는 정치적 간섭을 막아주면서 혁신과 창조적 파괴가 계속되어 장기적인 경제적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떠받치게 된다.  

 

슘페터는 자기의 귀족적인 성장 배경 그리고 영국과 이의 경제정책에 대한 호감 덕분에 개인적으로는 사회주의에 호감을 가졌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학자로서 연구의 결과를 논리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또한 마르크스로부터도 깊은 영향을 받았었는데 그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붕괴를 예언하였지만 그 이유는 자본주의의 자체의 구조적 문제점 때문이 아니라 외부의 영향 즉, 정치와 사회의 변화 때문이라고 보았다. 실제로도 대공황이 일어났을 때 학자들은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주의의 종말이 아닌가 라고 생각했었지만 슘페터가 말한 것처럼 이후에도 자본주의는 창조적 파괴에 의한 혁신의 지속으로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사실 슘페터 생전에는 동시대의 경제학자 스타인 케인즈에게 밀려 최고의 자리에 앉지는 못하였지만 오늘날 주류 경제학이 위기를 겪고 있음으로써 거의 반세기만에 경제학자와 사람들의 흥미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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