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이 법원에 출석하면서도 올림머리를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 5월 23일 법정에 출두했을 때, SNS에서는 ‘박근혜 머리’가 실시간 검색어 3위에 올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평소에 하던 손이 많이 가는 올림 머리 대신 머리핀으로 유사한 모양을 냈다.
구치소에는 머리핀 반입이 안되는 것으로 알려졌었는데, 누가 박근혜에게 머리핀을 제공했는지가 논란이 되었으며, 일종의 특혜를 받고 있는 것으로 비추어졌기 때문이다. 이렇듯 지난 몇 달에 걸친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에서 여성의 머리 모양은 부정적으로든 긍정적으로든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찬양이 되든, 비난이 되든 간에, 대중들은 일종의 ‘아줌마 펌’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아줌마 머리 |
1980년대 TV 앞에 모여있는 파마한 여성들.
한국에서 이 아줌마 머리는 나이 든 기혼 여성들의 표준적인 헤어 스타일이다. 흔히 파마를 한 짧은 머리를 지칭하는 ‘아줌마 머리’를 한다는 것은 긴 생머리 혹은 웨이브가 들어간 젊은 시절을 지나 중년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식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에서 이런 아줌마 머리가 널리 퍼지게 되기까지는 8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한국에서의 첫번째 파마는 일제 강점기였던 1937년 서울(당시 경성)의 한 백화점에서 이루어졌다. 이 당시 파마의 가격은 쌀 2가마니에 달해 당시 가난하고 궁핍했던 일반인들이 범접할 수 없는 사치였다. 따라서 이 당시에는 일부 배우나, 부유층 여성들 만이 이 최신 스타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마저도 1940년대에 접어들자, 할리우드의 영화가 보여주는 성적 자유주의 규범에 대해 반감을 표했던 일제에 의해 금지당하고 말았다. 일제의 통치는 5년 후 1945년 끝났지만, 파마가 부활한 것은 민족의 비극인 6.25 전쟁이 끝난 이후였다.
이 당시 한국의 파마 기술은 매우 부실했다. 여성들은 한복을 다림질하는데 썼던 인두와 거친 화학약품을 사용하여 머리를 말았다. 이 과정은 매우 위험했다. 여성들은 두피에 화상을 입어 벗겨지기도 하였으며, 심지어 목과 얼굴에도 종종 화상을 입곤 했지만, 파마의 결과는 오늘날처럼 매끄럽지 못했다.
1960~7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 기간동안, 사회적인 제약이 심해졌다. 치마의 길이와 남성의 장발을 단속했지만, 여성의 파마는 이런 규제를 받지 않았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파마를 하는 것은 일종의 ‘모던’함을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 당시만 하더라도 파마는 여전히 값비싼 사치였다. 사람들은 가난했고, 여기에 당시 막 걸음마를 떼던 가발산업이 눈독을 들였다. 가발 제조없자들은 시골로 가서 긴 머리를 가진 여성들에게 머리카락을 제공 받는 대신, 무료로 파마를 해준 것이다. 그 덕분에 그리 부유하지 않은 일반 서민들도 파마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보수 친박 집회에 참여한 중년 여성들 역시 일종의 '아줌마 머리'를 하고 있다.
198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전기가 안정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고, 파마에 드는 비용 역시 하락했다. 정부에서는 미용산업에 본격적으로 드라이브를 걸기 시작했고, 많은 교회와 같은 단체에서도 역시 젊은 여성들에게 미용과 헤어를 하는 방법을 무료로 알려주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파마는 여성 뿐만 아니라 전 연령대의 남성에게 까지 퍼졌고, 심지어 어린 아이들까지 파마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파마를 가장 많이 했던 것은 전 계층에 걸친 중년 여성들이었다. 여성들은 어느정도 나이가 들면 긴 머리를 자르고 파마를 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진 것이다.
세계 어디서나 길고 찰랑거리는 머리는 젊은 여성들에게 좀 더 잘 어울린다는 인식이 존재한다. 그리고 특히 한국에서는 이 같은 편견이 좀 더 강하다.
중년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머리의 볼륨이 부족해져, 머리를 짧게 짜르고 파마를 하게 된다. 젊었을 땐, 모발이 풍성했고 또 힘이 있었는데, 40대와 50대에 접어들면 더 이상 예전 같지가 않다고 한다. 아이를 가지고, 호르몬이 변화하며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모발이 가늘어진 것이다.
아줌마가 된다는 것 |
한국에는 3가지 성별이 있다는 농담이 있는데, 남성과 여성 그리고 아줌마라는 것이다. 아줌마로 접어드는 시기는
보통 30~40대 사이인데, 이 과정에서 사회적 편견이 개입된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여성들은 아줌마가 된다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다. 마치
더 이상 여성이 아니라는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전통적으로 여성은 결혼을 하게 되면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었다. 아이가 생기고 집안일이 바빠지면 여성들은 젊었을 때처럼 머리 스타일에 그리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파마를 한다는 것은 더 이상 머리에 신경 쓰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파마를 하게 되면 하루에 한번 머리를 감는 것으로 족하기 때문이다. 머리카락이 눈을 찌르지도 않고, 묶을 필요도 없다. 아이를 돌보고, 목욕시키고, 식사를 준비하고, 집안 청소를 하는데도 시간이 모자르기 때문이다. 효율성의 문제였다.
오늘날엔, 많은 여성들이 전업주부로 은퇴하기 보다는 커리어를 이어 나가는 것을 선택하는데, 과거와 반대로 파마는 바쁜 직업 여성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아줌마 파마는 나름의 방식으로 일종의 해방감을 준다. 한국 사회에서 젊은 여성들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할 수 밖에 없다. 깔끔하게 보여야 하며, 행동도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아줌마가 된다는 것에는 어떤 힘이 있으며, 또 일종의 자유를 준다. 더 이상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맞추어 조신하게 굴지 않아도 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 아줌마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이 여럿 존재하는데 대표적으로 아줌마들은 거칠다거나, 뻔뻔하거나,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고정관념은 1960~70년대 혼란스러웠던 정치, 경제적 배경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처음 세상에 노출되었을 때, 사람들은 최순실을 ‘강남 아줌마’라 지칭했다. 이는 말 그대로 부유한 지역인 강남에 살고 있는 아줌마를 의미하는 말인데, 강남 아줌마라는 용어는 부유하고 잘 교육받은 여성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통용되는 ‘아줌마’라는 개념에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하철에서 아줌마들은 주위에 사람이 얼마나 많건 간에 빈 자리가 생기면 사람들을 밀치면서 달려가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본인이 원하는 것을 진상을 부린다던가 하는 부정적인 고정관념이 있다.
박근혜의 머리는 항상 틀렸다 |
박근혜는 암살당한 육영수 여사를 대신해 젊은 시절부터 영부인의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올림머리는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 유지되어온 박근혜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박근혜는 올림머리를 하지 않은 모습을 언론과 대중에 거의 노출하지 않았다. 올림머리는 박근혜의 상징이었는데, 이는 박근혜의 모친이었던 육영수 여사의 스타일을 현대에 맞게 거의 그대로 따라한 것이었다.
그리고 탄핵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 세월호 사건 당시 의문의 7시간 동안 박근혜는 신속하게 구조를 지휘하는 대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이 올림머리를 하느라 제대로 사건에 대응하지 못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대통령 박근혜에 대한 탄핵 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검찰에서도 박근혜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지만, 헌재에서 통과되지 않아 대통령이라는 신분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박근혜는 검찰의 조사를 거부할 수 있었다. 그러자 대중들과 언론에서는 감옥에서 보여질 박근혜의 흐트러진 모습에 대한 농담이 돌기 시작했다. 한 국회의원은 어느 날 박근혜가 잠에서 깨어 더 이상 올림머리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제서야 탄핵당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지난 3월 사람들의 입에 올랐던 또다른 아줌마 머리가 있었다. 박근혜의 탄핵심판에 출두하기 위해 아침 일찍 법정으로 향하던 이정미 헌법재판관의 머리였다. 차에서 내린 이정미 재판관의 머리에는 헤어롤이 그대로 꽂혀 있었다.
이번엔 대중과 언론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바쁜 와중에 스스로 머리를 한 이정미 재판관의 흐트러진 모습은 세월호 참사 당시 억지로 꾸면 낸 박근혜의 허영심과 대비되는 인상을 준 것이다. 이정미 재판관은 당시 공석이었던 헌법 재판소 소장직을 대리하고 있었으며, 총 8명의 재판관 중 유일한 여성이었다.
반면 지난 재판정에서 보인 박근혜의 핀으로 만든 올림머리는 더 이상 권좌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필사적인 노력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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