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0년 독일의 해안도시 슈트랄준트에서 10여년간의 전쟁의 끝을 알리는 평화조약이 채결되었다. 북유럽의 강자였던 덴마크는 상대방에게 항행의 안전을 보장했으며 무역과 어획산업에서의 특권도 인정했다. 덴마크는 주요 요새 뿐만 아니라 배상금도 상대방에게 물어주게 되었다.
당시 북유럽의 패권까지 노리던 신흥강국 덴마크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줬던 전쟁 당사국은 멀쩡한 국가가 아니라 상인들이었다.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 오늘날 독일의 유명 항공사에까지 그 이름을 남긴 상인집단, 바로 한자 동맹이다. 국가도, 왕도, 심지어 귀족도 아니었던 상인들이 어떻게 덴마크를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었을까? 한자동맹은 독일 뿐만 아니라 스웨덴과 덴마크 그리고 러시아 등 발트해 지역 전역에 퍼져 있던 상인 도시들의 연합이었다. 전성기 때는 최대 83개의 자유무역도시들이 연합하여 유럽의 왕과 제후들을 상대로 각종 이권을 획득하였다.
이들은 자칭 ‘독일로마제국의 상인조합’이라 칭했다. 당시 독일 지역에 스스로를 로마제국이라 칭하던 신성로마제국이 자리잡고 있었지만, 황제의 통치력은 물론 제후국들과 각 도시들간의 결속력도 매우 약했기에, 이들 상인연맹은 서로 이해관계에 따라 결속하며 점차 자체적인 영향력을 키워갔다. 한자동맹은 신성로마제국 내의 도시들 뿐 아니라 역외의 주요 무역거점도시까지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며 그 세를 넓혀갔다. 심지어 나중에는 독일 기사단도 한자동맹에 합류하기까지 했다.
때로 이들의 상업적 성공을 시기한 국왕들이 나타나서 이권을 빼앗아가려 했지만, 한자동맹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슈트랄준트에서 맺어진 덴마크와의 평화조약 역시 그 기원은 13세기까지 거슬러올라간다. 이 당시 북독일의 상업도시들은 2차례에 걸친 덴마크와의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결국에는 승리를 쟁취하였다. 이는 발트해 연안의 경제가 호황을 누렸기 때문이다. 새로운 농업기술의 발달과 인구 팽창 그리고 중동지방과의 중계무역으로 번창하고 있었지만, 사실 이 당싱의 주력 산업은 고기잡이였다. 당시 발트해 지역은 배가 지나다니기 곤란할 정도로 청어가 풍년이었다고 한다. 이 청어를 잡고 가공하며 유통하는 모든 과정에서 발트해 연안의 도시들은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
유럽지역 전체가 가톨릭 아니면 동방정교를 믿던 이 시기, 육식을 하지 말아야하는 사순절 금식 기간과, 육류 섭취가 어려웠던 동절기의 대체 식량이었던 청어는 필수식량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군대의 비상식량 역시 청어를 꼭 필요로 했다. 청어잡이와 염장 그리고 유통 과정에서 발트해 연안 도시들은 이와 연계된 산업들을 발전시켰다. 고기잡이와 무역에 필요한 배를 건조하는 조선업, 염전을 비롯한 소금 생산업 그리고 청어 유통에 필요한 상자를 만드는 목재산업까지 막대한 이익을 거둬들였다. 한자동맹 소속 도시국가들과 상인들은 이 청어를 판 돈으로 잉글랜드 산 양모와 저지대의 모직 제품, 스웨덴과 러시아의 목재 그리고 독일의 맥주를 구매하여 유럽 곳곳에 팔았다. 북유럽의 강국이었던 덴마크와의 전쟁에 필요한 자금이 바로 여기서 나왔다.
덴마크의 패배는 발트해 연안 상인들의 연합체 정도로 인식되던 한자동맹이 경제적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주요한 플레이어라는 사실을 대내외에 선포한 것이었다. 당시 유럽의 무역 시스템에 크게 의존하지 않던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 각국들과 한자동맹 사이의 무역량은 날이 갈수록 확대되어갔다. 한자동맹은 영국과 벨기에, 스웨덴, 러시아 등 주로 북해-발트해 연안을 따라 상관을 설치하고 막대한 경제력을 배경으로 무역특권을 확보했다. 한자동맹은 슈트랄준트 평화조약 체결 후 100여년이 지난 1470년에는 런던에 설치한 상관의 무역특권을 놓고 잉글랜드와의 전쟁에 돌입했다. 약 4년간 전쟁이 지속되었지만, 이 전쟁에서도 이겨 각종 무역 특권들을 유지했다.
하지만 바로 이 시기가 한자동맹이 마지막으로 빛나던 시기였다. 과거와 달리 정치적인 위상은 높아갔으나 경제적으로 위기가 다가온 것이다. 한자동맹의 입장에서는 여러가지 악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정치적으로 안정을 찾은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의 상인들이 국가의 지원아래 한자동맹의 영역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유럽의 주요 상품이었던 모직을 만들던 네덜란드와 모직에 필요한 양모를 수출하던 영국이 자체적으로 상업을 확대하며 새로운 형태의 선박들을 건조하면서 한자동맹의 상권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한자동맹은 과거의 승리에 도취되어 이러한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오히려 무역특권을 과도하게 요구했다.
자유무역에 기반을 두고 성장한 한자동맹은, 무역에서의 압도적 우위를 확보했다 자신하고 보호무역으로 정책을 선회했다. 1434년부터 외국인 선주를 금지했으며, 심지어 외국인에게 선박의 양도, 판매는 물론 외국인 선주의 배를 빌리는 것도 금지했다. 또 한자동맹의 상품은 한자동맹 소속 선주의 배에만 적재하도록 했다. 그러나 제조업 기반 없이 중개무역으로 번성하던 한자동맹의 이런 배타적 무역 정책에, 산업과 무역의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던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도 대응에 나서며 자국의 해운 역량을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한자동맹에 더욱 치명적인 사건은 따로 있었는데 때마침 독일에서 발발한 30년 전쟁이었다. 독일의 영주들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나뉘어 혈전을 벌였던 30년 전쟁 기간 동안 독일의 도시들은 초토화 되었고 한자동맹도 여기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또 한자동맹의 가장 큰 자금줄이었던 청어도 갑자기 사라졌다. 발트해를 가득 채웠던 청어의 산란지가 14세기 말 무렵부터 갑작스럽게 북해로 이동한 것이었다. 네덜란드가 대제국 스페인에 대항한 독립전쟁에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던 것 역시 북해에 어장이 형성된 청어잡이와 각종 무역이 활황을 누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 네덜란드에서는 사회적 혁신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제조업과 금융업이 동시에 급성장하면서 한자동맹은 점차 우위를 잃어갔다.
결국 17세기 무렵에 이르자 한자동맹은 네덜란드와 잉글랜드에 의해 유럽의 시장에서 축출되었다. 동시기 지중해 연안에서 번성하던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처럼 발트해 연안 한자동맹의 핵심 도시들도 유럽을 휩쓸던 민족주의에 휩쓸려 사라지게 되었다. 비록 끝은 초라했으나 한자동맹이 유럽에 끼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부유한 자본가를 뜻하는 ‘부르주아’ 개념이 바로 한자동맹에서 나온 것이었다. 춥고 습했으며, 통일된 중앙 권력 없이 사방에 적으로 둘러 쌓인 북독일의 환경에서 상업활동을 통해 부를 획득한 상인들은 재산과 권리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성을 건설하였다. 독일어로 성벽을 뜻하는 ‘부르크’라는 이름이 붙은 도시들은 바로 이 과정에서 탄생한 경우가 많다. 이 시기 ‘성 안에 거주하는 사람’은 근대 이후 ‘자본가’로 발전하게 되었다.
앞서 한자동맹 쇠퇴의 원인이 되기도 했던 자국에서 건조한 배에, 자국산 물품을 싣고, 자국의 선원이 운항하는 선박에 연안무역의 특권을 부여한 미국의 유명한 ‘존스법’ 뿐 아니라 근대 유럽 각국의 보호무역 정책의 다수가 한자동맹에서 먼저 시작된 것이었다. 대항해시대와 산업혁명을 거쳐 패권을 다투던 유럽 각국의 발전전략에도 한자동맹에 대한 반성이 반영되어 있었다. 제대로된 제조업 기반 없이 중개무역에만 의존하다 사라진 한자동맹과 모직산업의 우위를 영국에 뺏기자 마자 쇠퇴하기 시작한 네덜란드의 사례를 본보기 삼아 유럽의 열강들은 자국의 제조업과 해운업 그리고 무역의 삼각체계를 중시하는 정책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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