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년 전 오전 7시 30분, 전혀 다른 삶의 궤적을 따라온 2명의 해병이 만난 것은 그날 아침이 처음이었다. 경계근무에 투입된 이들은 그로부터 정확히 9분뒤 이라크의 라마디에 위치한 미 해병대의 기지 초소에서 5000파운드의 폭탄을 가득 실은 파란색 대형 트럭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들은 같이 근무를 서던 다른 이라크 경찰들처럼 엄폐물 뒤에 숨어 생명을 유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상병 Jonathan Yale과 일병 Jordan Haeter는 땅 위에 굳건히 서 있었다. 그들이 버티고 서있던 단 몇 초가 기지에 있던 150여명의 생명을 구했다.
2010년, 그때 당시 중장이었으며 현재는 미 국토안보부의 장관을 맡고 있는 John Kelly 장군은 아프간전에 참전한 아들 Robert Kelly가 전사한 뒤 4일 후 장례식장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이 이야기를 전했다.
그는 9/11 테러와 미국이 싸우고 있는 적들 그리고 2001년 이래로 해외로 나가 미국의 적과 싸우고 있는 미국의 젊은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는 이 2명의 용감한 해병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음은 그의 연설 전문이다.
2년전 저는 이라크 주둔 미군과 이라크 군의 총 사령관을 맡고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2008년 4월 22일이었습니다. 2개의 해병 대대가 라마디에서 임무를 인수인계하고 있었습니다. 한 대대는 임무를 마치고 본토로 귀환하고 다른 대대는 이제 막 임무를 시작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각각 22살과 20살이었던 Jonathan Yale 상병과 Jordan Haerter 일병은 각각 다른 대대 소속이었습니다. 이들은 50여명의 해병이 주둔하고 있는 임시 막사의 정문 초소에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막사에는 100여명의 이라크 경찰 역시 함께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해병과 우리 동맹국의 경찰은 라마디에서 함께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라마디는 알카에다가 아직도 활개치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였습니다. Yale은 버지니아의 가난한 가정 출생의 혼혈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내가 있었고 딸이 있었으며 그에게 생계를 의존하고 있는 어머니와 남매가 있었습니다. 그의 연봉은 고작 2만3000달러에 불과했습니다. Haerter는 반대로 롱아일랜드의 중산층 가정 출신이었습니다.
이들의 세상은 전혀 다른 곳이었습니다. 그들이 해병이 되지 않았더라면 서로 절대 만날 일 조차 없었겠지요. 이들은 인종, 교육수준, 경제적 지위, 출생지에 따라 서로 다른 미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해병이었습니다. 지옥과 같은 훈련을 똑같이 견뎌냈으며, 이 공통된 경험 덕분에 이들은 마치 형제와 같은 끈끈한 전우애로 뭉쳐있었습니다.
그날 이들이 받은 명령은 아마 다음과 같았을 것입니다. “저 곳에 서서 허가 받지 않은 어떠한 사람 혹은 차량도 통과시키지 말 것, 알겠나?” 그리고 이 젊은이들은 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말로 하진 않았지만 아마 다음과 같은 억양이었을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정문초소에서 근무교대를 했습니다.
몇 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이들은 대형 트럭이 60~70야드 정도 되는 정문으로 이어진 오솔길을 따라 달려오기 시작했고 구불구불한 진입로를 따라 속력을 올리기 시작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트럭은 두 해병이 서있던 자리 바로 앞에서 멈췄고 이 둘의 목숨을 비극적으로 앗아갔습니다. 24채에 달하는 석조 건물들이 파괴되거나 손상을 입었습니다. 100야드 후방에 있던 모스크는 붕괴되었고 트럭의 엔진은 200야드를 날아가 그 곳에 있던 건물들에 부딪혔습니다.
군의 폭발물 전문가들은 현장을 감식한 후 트럭에는 적어도 2,000파운드 이상의 폭발물이 들어있던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희생자는 2명의 해병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이 2명의 DNA에는 위험에 직면했을 때 도망가라는 본능이 새겨져 있지 않았기에, 150명의 이라크 경찰과 미군 전우들의 목숨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
상황 발생 몇 시간 후, 보고서를 받으면서 저는 연대 사령관을 불러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무언가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그리고 전투가 발생하면 해병들이 죽거나 혹은 심각한 부상을 입는 일은 빈번합니다. 우리는 계급이나 임무에 관계없이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해병이라면 제 자리에서 본인의 임무를 수행할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조금 달랐습니다.
연대 사령관은 테러 현장에 직접 시찰을 나갔다 왔으며 그 역시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그 테러 당시 미군 목격자는 없었고 이라크 경찰들의 증언만이 유일했습니다. 이 해병들의 용감함을 기리는 훈장서훈을 추천하기 위해서는 뭔가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습니다. 워싱턴의 관료들은 이라크 경찰들의 증언만으로는 절대 훈장을 승인하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날 라마디로 가서 6명의 이라크 경찰들과 직접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들은 모두 같은 증언을 했습니다. 파란색 트럭이 진입로로 들어오자마자 속도를 급격하게 올렸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2명의 해병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고 그제서야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깨달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일부 이라크 경찰들도 같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주장했고 폭발이 일어나기 직전에야 겨우 피신했다고 했습니다.
모두 살아남았지만, 심각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어느 한 흥분한 이라크인은 눈물을 보이며 “다른 사람들은 마치 평범한 사람들처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쳤습니다.”라 주장했습니다.
그때까지 그 이라크인이 몰랐던 것은 그리고 그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알게 되었던 것은 바로 해병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감정에 복받쳐서 그는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장군님, 신에게 맹세코, 미치지 않은 이상에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그 해병들이 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들이 저희를 구했습니다.”
미 해군 수훈장
우리는 그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만, 해군 수훈장에 Yale과 Haerter를 추서하기 위한 보고서를 쓴 이후에 폭발에 휘말려 파괴된 카메라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카메라의 기록을 복원한 결과 이라크 경찰들이 증언한 것이 그대로 담겨있었습니다. 트럭이 진입로에 들어서고 초소까지 다가와 폭발하기까지 정확히 6초가 걸렸습니다.
이 젊은이들의 생에 마지막 6초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그들의 상황에 있었다 가정하고 생각해보면, 진입로에 트럭이 포착되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하는데 아마 1초정도가 걸렸을 것입니다. 이 젊은 해병들은 동일한 생각을 했겠지만 그 사실을 대화로 나눌 시간은 없었을 것입니다. 상관에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무선으로 연락을 취할 시간도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허가 받지 않은 어떤 사람이나 차량도 통과시키지 말 것이라는 몇 분전에 받은 지시만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이제 두 해병에게는 단 5초의 시간만 남았습니다. 많이 목숨을 부지하고자 했다면 바로 피해야했습니다. 무기를 들어 조준하고 발포하는데 또 다시 대략 2초정도의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이제 트럭은 진입로를 따라 절반정도 접근했고 점차 속도를 높이고 있었습니다. 해병을 따라 소총을 발사하였던 이라크 경찰들도 이제 다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평범하고 이성적인 다른 사람들처럼요. 어떤 이들은 해병들의 곁을 그대로 지나쳐서 도망가기도 했습니다. 이제 이들에게는 3초의 시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 중 2초동안, 기록된 비디오 화면에서 해병들의 무기는 계속해서 불을 뿜었습니다. 트럭의 창문이 깨지면서 미군과 이라크 경찰을 상대로 테러를 저지른 씨발놈의 몸뚱아리도 같이 갈갈이 찢겼습니다. 막사에서 쉬고있었던 형제들은 그들의 생명이 자신들의 자리에 꿋꿋이 서 있던 이 두 해병들에게 달려 있었다는 사실을 그 당시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아니 만약 알았더라도 이 두 해병이 미친 자폭테러범과 그들 사이에 서 있기에 그들이 안전하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비디오 기록은 트럭이 이 두 해병의 바로 앞에서 멈췄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 급박한 상황에서 Yale과 Haerter은 전혀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보고와 비디오 기록은 이들이 단 한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았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단 한발자국도 옆으로 움직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의 발은 어깨 넓이로 벌어져 있었고 상체는 앞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급박한 상황에서 개인화기를 가장 빠르게 발사할 수 있는 자세입니다. 이제 이들에게는 단 1초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트럭은 폭발했습니다. 카메라도 꺼졌습니다. 이 젊은 두 청년은 이제 하느님께 갔습니다.
단 6초였습니다.
그들의 가족에 대해서도, 조국과 성조기에 대해서 혹은 그들의 삶과 죽음을 생각하기도 짧은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 용감한 두 청년이 그들의 임무를 완수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바로 이 사람들이 세계 방방 곳곳에서 여러분의 안전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
'# 역 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줌마 머리와 박근혜의 올림머리 (0) | 2017.06.04 |
---|---|
중세 유럽의 재벌집단이었던 한자동맹 (0) | 2017.06.03 |
하늘에 떠 있던 유일한 비행기, 에어포스 원의 9월 11일 8시간의 생생한 기록 (3) (0) | 2017.04.11 |
하늘에 떠 있던 유일한 비행기, 에어포스 원의 9월 11일 8시간의 생생한 기록 (2) (0) | 2017.04.05 |
하늘에 떠 있던 유일한 비행기, 에어포스 원의 9월 11일 8시간의 생생한 기록 (1) (0) | 2017.04.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