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규모 예산이 투입된 블록버스터와 압도적인 영상으로 유명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동의 대표작은 인셉션과 인터스텔라와 같은 SF영화와 평단과 대중의 호평을 받은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이다. 그리고 곧 개봉을 앞둔 놀란의 다음 영화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현실에 기반을 둔 영화이다.
2차대전 기간 중 덩케르크에서 있었던 연합군의 극적인 철수를 그린 크리스토퍼 놀란의 <덩케르크>는 20세기의 가장 전설적인 전쟁사 중 한 부분을 재현한다고 한다.
놀란의 특징인 디테일과 사실성 추구는 이미 공개된 트레일러 영상에서도 잘 드러났다. 대부분의 영상을 IMAX 전용 카메라로 촬영하였으며, 촬영 장소 역시 CG가 아닌 실제 전투가 있었던 덩케르크 바로 그 장소였다. 가능한 한 놀란과 그의 팀은 CG를 사용하지 않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 시대에 사용되었던 실제 해군 함정과 전투기들을 동원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덩케르크>에서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엄청난 사실감을 담는데 성공했다.
배경
그러나, 현대의 관객들은 덩케르크 전투와 다이나모 작전에 대해서 그리 많이 들어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작전이 2차 세계대전에 끼친 영향 역시 그리 쉽게 실감하지는 못할 것이다. 다음은 영화 덩케르크에서 그린 실제 전투가 실제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 그리고 이 전투가 후대에 미친 영향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다.
한국의 관객들은 아마도 덩케르크의 중요성에 대해서 잘 실감하지 못할 수 있다. 덩케르크에서의 전투는 1940년 6월에 있었는데, 이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일본의 진주만 침공보다도 거의 1년도 더 전이다. 1940년 나치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폴란드를 침공하여 소련과 양분했다. 결과 영국에서는 전시내각이 성립되어 윈스턴 처칠이 총리로 취임했고 연합군(영국, 프랑스, 벨기에 등)은 히틀러의 야욕을 막기 위해 독일 국경을 따라 방어선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프랑스에 대한 전격적인 침공(벨기에와 룩셈부르크, 그리고 네덜란드 역시 독일군의 침공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다)은 오늘날 ‘프랑스 전역’으로 불리고 있는데, 이는 1940년 5월과 6월에 벌어졌다. 이 기간동안 독일군의 사상자는 2만7천명에서 4만9천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연합군의 희생은 이보다 막대했다. 최소한 85000여명의 사망자가 프랑스군에서 발생했으며 부상자 역시 12만명에 달했다. 프랑스를 지원하기 위해 유럽대륙에 파견되어 있었던 영국 해외 원정군(British Expeditionary Force)역시 1만여명이 사망하고 6만여명이 부상당했다. 2차대전 전체로 보면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던 전투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는 전쟁 초기에 연합군이 당했던 매우 심각한 패배였다.
덩케르크 전투 그리고 다이나모 작전
프랑스 전역 중 있었던 덩케르크 전투와 다이나모 작전이 크리스토퍼 감독의 영화 <덩케르크>에서 다루는 내용이다. 나치의 프랑스 침공 초기, 독일 육군은 연합군을 말 그대로 몰아붙였다. 예상을 깨고 벨기에의 산림지역을 통과해 배후에 나타난 독일군에 의해 연합군의 방어선은 말 그대로 붕괴했다. 패닉에 빠진 연합군은 독일군의 기동에 의해 와해되었으며 수십만에 이르는 병력이 프랑스의 해안 도시인 덩케르크로 밀려났다. 그리고 기갑부대를 앞세운 독일군에 의해 일망타진 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독일군은 궁지에 몰린 연합군을 눈 앞에 두고 갑자기 진격을 멈췄다. 그리고 그 덕분에 연합군은 탈출할 시간을 벌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히틀러가 연합군을 모조리 죽이는 대신 포로로 잡기를 원했다 하기도 하며, 또 다른 이들은 히틀러가 이미 승리한 프랑스 전역에서 독일군의 기갑부대를 소모하기 보다는 피해 없어 보존하기를 원했다고 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연합군은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활용하여, 다이나모 작전을 실행했다. 나치가 장악한 유럽대륙에서 잔존한 연합군을 안전하게 철수시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말 그대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함정들을 동원했으며, 민간인들도 이 작전에 참여했다. 철수를 하는 연합군의 후위를 보호하기 위한 ‘덩케르크 전투’도 후방에서 벌어졌다. 독일군의 다이나모 작전에 대한 첩보를 입수하자, 히틀러는 격노하여 즉각 독일군의 진격을 명령했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11일동안 이어진 철수 작전을 통해, 영국군을 포함한 연합군 33만 8천여명이 영국으로 안전하게 철수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독일군의 전격적인 프랑스 침공과 그 성공은 연합군에게는 치명적인 상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덩케르크의 기적’은 한줄기 희망과도 같았다.
전선에서의 재앙에 가까운 패배 때문에, 연합국에겐 사기를 진작시킬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ㄱ기에, 덩케르크의 기적은 대대적인 선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덩케르크에서의 안전한 철수는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해안가는 독일 포병대의 포격으로 뒤덮였으며, 독일 공군 역시 철수작전을 방해하기 위해 대규모 폭격을 퍼부었다. 철수하는 연합군의 후위를 지키기 위한 전투에서 역시 수천명의 연합군 장병들이 사망했으며, 연합군은 덩케르크에서 간신히 몸만 빠져나왔기에, 탱크와 차량 등을 비롯한 막대한 군 장비들과 군수품들은 그대로 독일군이 접수했다. 게다가, 33만여명이 안전하게 철수했음에도, 여전히 수만명의 연합군 장병들이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그리고 이들은 대부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독일에서 강제노역을 해야 했다.
여파
프랑스 전역은 연합군의 명백한 패배였다. 독일군의 프랑스 침공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성공적이었고, 연합군은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덩케르크에서의 성공 덕분에, 처칠은 완전한 패배에 대한 절망감을 머지않은 미래에 성취하게 될 승리에 대한 약속으로 바꿀 수 있었다. 그리고 수 년의 시간과 수십만의 희생자를 뒤로하고 결국에 연합국은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
1940년 6월 4일, 덩케르크에서의 철수가 끝났다. 그날 처칠은 의회에서 궁극적인 승리를 향한 희망과 이를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할 것임을 다짐하는 역사에 길이남을 연설을 했다.
“영국은 약해지거나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프랑스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바다와 대양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감과 힘을 길러 하늘에서 싸울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영국을 지켜 낼 것입니다.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상륙지점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들판과 거리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언덕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언론들은 덩케르크에서의 철수를 연합군의 강인함과 정신력의 상징으로 선전했다. 전투는 끝났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프랑스는 독일군에 점령당했지만, 4년 후 연합군은 새롭게 참전한 미국과 함께 소련과의 힘겨운 전쟁을 벌이고 있는 나치를 몰아내고 프랑스를 해방시켰다.
나치의 프랑스 침공은 유럽을 절망으로 몰아넣었지만, ‘덩케르크의 기적’은 연합군을 결속시키고, 결국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영화의 모토처럼 덩케르크는 “우리 세계를 구한 사건”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