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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이 우리에 준 교훈

category # 역 사 8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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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은 현대 산업화 사회의 개막 이래 세계 경제에 대한 가장 커다란 위기였다. 그러나 대공황에 대한 세계 각국의 대응은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었다. 세계는 이 실수로부터 무언가를 배웠을까?




검은 목요일



1929년 여름이 끝나갈 무렵, 예일 대학의 유명한 경제학자인 어빙 피셔가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주식시장에 대한 의견을 피력했다. 주식시장은 지난 일년 동안 계속해서 상승했다. 투자자들은 좋은 시절이 계속 될 것이라는 믿음아래 빌린 돈으로 투기를 계속해왔다.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황소시장(상승시장)이었고 이 도박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본인의 판돈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피셔는 확신에 찬 예측을 내 놓았다. “주식 시장은 장기적으로 지속될 고원지대에 진입했다.” 그날은 월스트리트의 1929 10월 악몽까지 채 2달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는 다른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역사상 최악의 주식 시장에 대한 예측이었다.

 

대공황은 주가가 11% 폭락하면서 10 24일 목요일에 시작되었다. 검은 목요일이었다. 그 바로 다음주 월요일에는 13%가 빠지면서 검은 월요일로 기록되었고, 그 다음날 또 12%가 폭락하면서 검은 화요일이 되었다. 11월 초, 피셔는 너덜너덜해졌고, 주식시장은 1932 6월이 될 때까지 끊임없이 떨어지는 하강나선을 그렸다. 당시 뉴욕 증권 거래소에 상장되어 있던 기업들의 시가총액은 90%이상이 증발했고, 세계의 역사도 영원히 바뀌었다.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 뉴욕 증권 거래소 앞에 주식 투자자들이 운집해있다.


이 대폭락 직후에 바로 대공황이 뒤따라왔다. 18세기 중반 현대 산업시대가 개막한 이래, 대공황은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경제 침체였다. 피셔의 끔찍했던 예언이 발표되고 단 3년만에 미국 노동자의 1/4이 직장을 잃었고, 희망도 잃었다.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표현에 따르면, “1930 1931년 그리고 1932년에 어떤 사람들은 밥을 굶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밥을 굶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떨었다.”

 

파산하지 않은 은행들은 채무자들에 대한 압류를 걸었으며, 부채증가와 상품가격하락에 이중고를 겪고있는 농민과 공장들의 고통을 나눠줄 안전장치 따위는 없었다. 한 추정치에 따르면 미국인 중 3400만명은 전혀 소득이 없었다고 한다. 1932년 중반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하버트 후버 대통령의 문제 해결에 대한 접근법은 미국인들로부터 신임을 잃었고,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즈벨트로 정권이 교체되었다.

 

대서양 건너편에서, 독일은 지독한 불황이 끝나고 채 10년도 지나지 않아 또다시 대공황을 겪게 되었다. 1차대전이 독일의 패배로 끝나면서 베르사유조약을 맺었다. 그 때문에 독일은 초인플레이션을 겪었다. 1달러가 4.2조 마르크로 환전 되고, 사람들은 휴지조각만큼의 가치도 없는 돈 더미를 수레에 실어 끌고 다녀야 했다. 1932년 가혹한 긴축정책으로 인해 독일에서는 6백만명의 실업자가 발생했다. 파운드화의 하락으로 인해 영국의 수출이 확대되면서 독일은 더 큰 고통을 겪었다. 독일의 산업 노동자들 중 40%는 일자리가 없어졌고, 나치는 공산주의자들과 주도권 싸움을하고 있었다. 1932년 하인리히 브뤼닝 독일 총리의 긴축 정책이 실패했고, 아돌프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했다.

아무도 대공황이 오는 것을 예측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피셔의 예측은 1929 9월 초 투자 전문가 로저 뱁슨의 정 반대되는 시장예측에 대한 반론이었다. 뱁슨은 전미 비즈니스 컨퍼런스에서 곧 최악의 경제위기가 올 것이라 예측했다. 뱁슨은공장들은 문을 닫을 것이고, 일자리도 사라질 것입니다. 악순환이 시작될 것이며, 그 결과는 심각한 경기 침체가 될 것입니다.”라고 경고했다.

 

이렇게 불길한 예언은 실제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뱁슨 역시 무시당했다. 2008년의 위기를 예언한 닥터 둠(Dr. Doom) 뉴욕대 교수 누리엘 루비니 역시 비슷한 취급을 당했다.

 

가난한 이민자 어머니.




F 스콧 피츠제럴드는 대공황을 재즈시대의 종언이라 표현했다. 자유로운 상품과, 자본이동, 시장의 자유 덕분에 세계 1차 대전 이전부터 자본주의는 황금기를 맞이했다. 1918년 총성이 멎고 다시 평화가 찾아온 후에도 정책입안자들은 자유방임주의의 황금기를 본받아 영원할 것만 같았던 호황을 다시 재건하려했다. 그러나 대공황으로 인해 자유방임주의 대신 고립주의, 보호무역주의, 공격적인 민족주의와 전체주의가 퍼져 나갔다. 그리고 1939년 전쟁준비를 위해 전시산업체제로 전환하기 전까지 각 국의 경제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영국에서는 경제회복이 남부 잉글랜드지역에만 집중되었고, 구 산업중심지의 실업률을 상쇄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대공황이 발생하고 7년이 지난 후, 실업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 Jarrow March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는 미국도 비슷했다. 루즈벨트의 첫 번째 임기 중에 조금씩 회복되던 경기는 1937년의 미니슬럼프로 끝나버렸다. 윈스턴 처칠은 1914년에서 1945년에 이르는 기간을 제 2 30년 전쟁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자본주의 역사에서 지난 2008 9월 리먼 브러더스 파산으로 촉발된 금융시스템 붕괴만이 대공황의 검은 화요일과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대공황이 없었다면 뉴딜과 케인즈주의가 없었을 것이며, 루즈벨트는 뉴욕시장을 넘어서 대통령에까지 도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히틀러 역시 1920년대의 반짝 스타를 넘어서, 역사에 그리 큰 발자취를 남기지도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2008년 금융위기와 이 금융위기가 미친 영향이 없었다면, 도날드 트럼프는 여전히 성공한 부동산 업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을 것이며, 마린 르 펜 역시 프랑스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유럽을 뒤흔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1930년대에는 기득권층에 반발하는 포퓰리스트들의 거센 분노가 존재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장기간 지속되는 경제 침체로 인해 경제정책에 대한 기존과 다른 접근방식을 추구하는 정치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930년대 초와 2010년 중반 시기는 공통점이 있다. 정치적 기득권들은 대다수의 유권자들로부터 신뢰를 잃었고, 유권자들은 기존의 모델을 거부하며, 현재 사회구조와, 기득권들에 맞서 싸울 새로운 정치인들을 원하고 있다.  

 

트럼프는 미국 우선주의를 주장한 최초의 대통령이 아니다. 루즈벨트는 1933년 대통령에 취임한 이래로, 비슷한 정책을 펼쳤다. 월스트리트와 그 밖의 분야가 서로 이토록 큰 입장 차이를 가졌던 것 역시 처음이 아니다. 20년대 사람들이 은행가들에게 가졌던 혐오감은, 30년대 들어서 복수에 대한 열망으로 돌아왔다.

 

존 메이너드 케인즈의 전기 작가인 로버트 스키델스키는 “2008년과 같은 이유로 대공황이 일어났다. 엄청난 규모의 부채가 있었고, 주식시장은 도박판이 되었으며, 자산 가치에 버블이 생겼고, 완전 고용 수준의 투자를 유지하기에는 이자율이 너무 높았다.”고 기록했다.





30년대와 지금의 유사점은 슈퍼파워의 쇠퇴



또 다른 유사점도 있다. 20년대는 자산가들에게는 유리했고, 노동자들에게는 불리했다. 20년대에 접어들면서 실업률이 급격히 증가했고, 1929년 대공황이 시작될 무렵이 되기까지도 실업률은 회복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경제호황의 과실 중 노동자들이 차지하는 몫은 점점 작아졌으며, 반대로 자본가들에게 20년대는 그야말로 황금기였다. 미국의 소득세 최고 세율은 32%로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고, 주식시장, 자산시장에 대한 투기가 절정에 이르렀다. 대공황이 발생하기 전 10년 동안 미국의 주식시장은 6배 이상 상승했다.

 

불평등 수준도 높아졌으며, 시장의 수요는 신용거품에 의해서 간신히 유지되었다. 1921년에서 1929년 사이 미국의 실업률은 8%, 독일은 9%였으며 영국 역시 12%에 달했다. 전후 노동시장은 한 번도 침체기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무엇보다도, 두 시기 모두 세계정세는 매우 불안정했다. 1815년 워털루 전투이후 75년간 평화를 유지해온 유럽 강대국들 사이의 세력 균형이 1890년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부터 쇠퇴하고 있었던 반면 독일과 미국, 러시아가 부상했다.


검은 목요일에 대해 보도한 신문의 1면


더 중요한 변화로, 19세기 후반 세계화를 이끌었던 영국은 1차 세계 대전 이후 예전의 영광을 회복하지 못했고, 더 이상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었다. 미국 역시 껍질을 깨고 나와 리더십을 발휘할 준비가 끝나지 않았다.

 

지금과 1920~30년대 사이에는 유사점이 있다. 바로 슈퍼파워가 쇠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20~30년대 대영제국은 천천히 쇠락하고 있었으며, 지금도 미국이라는 슈퍼파워가 점차 쇠퇴하는 과정에 있는 것일 수 있다. 1920년대는 제국주의라는 개념이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결국 미국이 세계질서를 형성하고 또 유지하는 역할을 영국으로부터 물려받기는 했지만, 이는 40년대에 일어난 일이었다. 미국은 전체주의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경제, 정치적 제도를 만들어냈다. UN IMF, 세계은행이 미국의 주도아래, 30년대 겪었던 끔찍한 경제위기의 재발을 막기 위해 설립되었다.

 

미국이 20세기 후반기에 수행했던 역할을 계속해서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미국이 하지 않는다면 누가 이 역할을 맡을 것인가? 아무도 그 역할을 맡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문제는 이로 인해 세계가 다시 혼란에 빠져들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디플레이션의 재앙



물론 이 두 시기 사이에는 유사점이 있는 만큼 차이점도 존재한다. 트럼프 취임 후 올해 스위스에서 열린 다보스포럼에서, 글로벌 비즈니스 분야의 엘리트들은 긍정적인 징후를 포착했다.

 

어떤 이들은 페이스북, 스냅챗, 구글과 같이 세상을 이어주는 기술에서 희망을 보았다. 다른 이들은 세계 무역에서 공급망으로 촘촘히 얽힌 이런 세상에서 수입산 제품에 대한 관세를 부과하는 것이 각국의 수출 가격을 상승시키며, 미국 같은 대국도 나홀로 경제 정책을 추진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WTO의 사무총장인 로베르토 아제베도는 “2008년 금융위기와와 1930년대 대공황의 차이점은 오늘날엔 국제사회가 다자간 무역 규칙에 동의하고 있지만, 1930년대에는 그러지 못했다.”

 

그러나 이 두 위기의 가장 큰 차이점은 1930년대의 대공황 시기에는 중앙은행과 재무부의 실수로 위기가 더 심화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주식시장의 위기가 대공황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며, 실제로 리먼 브라더스의 붕괴이후도 비록 잠시 침체는 겪었지만 대공황으로 까지 발전하지는 않았다.


1933년 미국 시애틀 외곽에 형성된 실업자 수용 판자촌 '후버빌, Hoovervile'


2008년 말 산업 생산 글로벌 교역의 지표들은 실제로 대공황 발생 첫 한달과 비슷한 형태를 보였다.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진행되는 동안 정책 당국은 허둥지둥했지만, 그래도 리먼 브라브라더 파산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과거 역사적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1930년대 초반에, 중앙은행은 이자율을 낮추기 전까지 너무 오랜 시간을 허비했고 디플레이션이 오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은행들의 파산은 수수방관했다. 높은 실업률과 추락한 경제 성장률로 인해 대규모의 재정적자가 발생했고, 정부는 설상가상으로 이를 만회하기 위해 세율을 인상시키고, 정부 지출을 줄임으로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대공황에 대한 대응은 사실상의 디플레이션 정책이었다. 케인즈주의자와, 통화주의자들 모두 동의한 것은, 이 디플레이션 정책이 끔찍한 결과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케인즈주의자와통화주의자들 모두 동의한 것은이 디플레이션 정책이 끔찍한 결과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Adam Tooze


그리고 이 합의의 핵심은 금본위제였다. 전 세계의 모든 법정화폐들은 고정된 환율로 금과 교환이 가능해야 한다는 믿음아래 성립되었던 제도였다. 금본위제는 자체 조정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국제교역에서 금의 유출되거나 유입됨에 따라 환율이 조정되며, 이에 따라 다시 교역수지가 균형을 찾는 것이다.

 

영란은행과 영국 재무부의 노력 끝에 영국은 1925년 금본위제로의 귀환을 선언했다. 전쟁 전과 같은 1파운드당 25달러의 환율이었다. 이로 인해 파운드화의 환율이 상승했고, 수출업자들은 더 힘들어졌다.

 

정책입안자들이 간과했던 사실은 이미 1914년 이전부터 세상은 바뀌고 있었다는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경제는 취약해졌다. 독일의 경제 역시 1914년과 1918년 사이에 붕괴되었으며, 전후 배상금 문제로 인해 더욱 어려워졌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미국의 경제는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었다.

 

이런 세력균형의 변화는 전쟁 전의 체제를 복구하는데 더 많은 시간과 고통스러운 과정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20년대 말에 이르자, 과거의 체제를 복구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힘들다는 생각이 퍼졌다.

 

정책입안자들은 대공황 초기에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역사학자들은 이 당시 중앙은행과 금융관련 행정부처들이 한 일은 경제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죽이는 것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영국에서는 이른바 자동 안전장치가 발동되었다. 경제성장이 둔화되면서 세금 납세자들의 수는 줄어들었고, 반대로 실업급여 수급자들은 늘었다. 공공 금융에는 적색경보가 들어왔다.


1937년 뉴욕에서 정리해고에 대한 반대집회중인 뉴딜정책 지지자들

 

경제위기가 심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추가적인 부채를 지면서 까지 재정을 투입하는 것을 선택하는 대신, 경제당국은 예산의 균형을 맞추려 노력했다. 당시 영국 정부는 ‘5월 위원회를 구성하여 재정 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조사했다. 당시 기업가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던 위원회의 성격을 감안한다면, 위원회의 결론은 분명했다. 파운드의 가치는 떨어지고 있었으며, 영국의 금본위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5월 위원회는 그 해 영국의 예산을 88500만 파운드에서 9700만 파운드를 감축할 것을 권고했다. 실업급여 예산 역시 예산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30%이상 삭감되었다.

 

이 예산 감축의 심각성은 노동당 정부를 분열시켰고, 제임스 램지 맥도날드 총리가 이끄는 거국내각이 성립되었다. 재무부는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파운드화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한 방안을 물었다. 또 금본위제를 유지해야 하는가 혹은 유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도 던졌다. 하지만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재정 전문가였던 워렌 헤이스팅스 경은 이 질문에 대노하며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금본위제를 떠나야 한다는 질문 자체가 대영제국에 대한 모욕이며 이 나라 모든 사람들에 대한 모욕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태도로는 파운드화 가치의 하락을 막지 못했고 영국은 결국 1931 9월 금본위제를 폐지하게 된다. 이는 작년 브렉시트 결정과 마찬가지로 세계에 큰 충격을 줬다.

 

파운드화는 평가 절하되었고 영국 정부가 대영국제국 산하 식민지들과 경제 블록을 형성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하며 영국의 수출은 되살아났다.

 

물론 영국이 처음으로 보호주의를 채택한 나라는 아니었다. 악명높은 스무트-할리 관세법이 미국에서 이미 1930년대에 발효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은 이미 과거에서부터 높은 수준의 보호주의를 채택하고 있었다.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19세기 후반, 미국의 제조업은 40%가 넘는 관세의 보호 아래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다. 반면 영국은 1846년 옥수수법의 폐지된 이래로 자유무역을 선호해왔다.


 

영국은 1931년 금본위제를 탈퇴하였는데, 이는 주요 국가들 중 처음이었으며 그 덕분에 영국은 꽤 많은 이득을 보았다. 독일은 산더미처럼 불어난 대외 채무에 대해 평가 절하를 하지 않고 채무불이행과 디플레이션을 선택해야 했기에 특히 더 고통이 심했다.

 

이러한 독일의 실패는 2008년 미국에는 큰 교훈이 되었다. 당시 미 연방준비제도 이사회의 의장이었던 벤 버냉키는 대공황의 교훈을 매우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같은 일이 일어나도록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자율은 거의 0%에 가깝게 떨어졌으며, 이른바 양적완화를 통해 대규모의 통화량을 증가시켰다. 파산직전에 내몰렸던 은행들은 구제되었고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의회를 통해 재정 부양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은 일부 성공에 그쳤다. 저금리와 양적완화 정책 덕분에 시중에 폭발적으로 늘어난 통화량으로 인해 대공황의 재현은 없었다. 그러나 주식, 채권 그리고 부동산 가격 등의 폭등을 유발하였고, 그 덕분에 부유층들은 손쉽게 막대한 재산을 증식했다.

 

이 거대한 돈방석 위에 올라타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힘든 시기였다. 임금 인상은 없었으며,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긴축정책이 시행되었다. 1930년 대공황의 모든 교훈이 제대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너무 성급한 재정 긴축정책으로 인해 경제회복이 둔화되었으며, 본인들의 잘못이 아닌 경제위기로 인해 큰 고통을 받았으며 경기 회복의 효과도 누리지 못하고 있는 대부분의 경제적 약자들은 큰 소외감을 느끼는 등 정치적 불안도 확대되었다. 2016년에 있었던 브렉시트와 미 대선 그리고 세계 각국의 선거에서 이러한 소외감으로 인한 분노가 크게 표출되었다. 분명 지표상 경제는 회복되고 있지만, 경제적 약자들에겐 아무런 변화가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전체주의적 해법



 

국제주의는 1930년 초반 이미 몰락했다. 이는 과도한 투기, 대규모 실업, 영구적인 생활수준 하락 과 같은 인기 없는 정책들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패하고 쇠퇴하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을 주장하며 전체주의 국가들이 등장했다.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소련에서는 스탈린이 권력을 잡았다. 세계화시대의 첫 번째 시대가 끝장나는 동안, 소련에서는 농장의 집단화와 급속한 산업화를 동시에 추진해 나갔다.

 

더구나, 1930년대 전체주의 국가들의 경제 실적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보다 월등히 앞서다. 영국, 미국 그리고 프랑스의 경제 성장률이 0.3%에 불과한 반면, 독일, 이탈리아, 일본 그리고 소련의 경제 성장률은 3.1%에 달했다.

 

1920년대 자유무역과 자유시장 정책은 안정과 성장을 가져오는데 실패했다. 히틀러와 스탈린 그리고 기존의 체제에 불만을 가진 자들은 포퓰리즘과 다른 수단을 사용해 정말 성공적인 결과를 냈다. 물론 잠시동안이긴 하지만.


주식 대폭락 이후 차를 팔고 있는 한 투자자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적 황폐화는 결국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이 정책을 다시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결정적인 순간은 바로 1931 9월 영국의 금본위제 탈퇴와 1933년 루즈벨트의 미국 대통령 취임이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취임 이후, 미국의 정책은 개입주의와 고립주의적인 모습을 모두 보였다. 영국이 영국 우선주의를 표방한다면 미국 역시 미국 우선주의를 채택할 수 있었다. 루즈벨트는 금본위제에서 벗어나면서 통화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시도를 취했다. 금융시장에는 강력한 규제를 했고 반대로 재정 정책은 완화되었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었다. 히틀러는 권력을 잡았고, 어쨌거나 대공황은 뉴딜정책이 아니라 전쟁 덕분에 해결이 될 수 있었다.



"대공황으로 인해 고립주의, 보호무역주의, 공격적인 민족주의 그리고 전체주의가 팽배해졌다."


그리고 오늘날 세계 역시 노동과 자본 분야에서 점점 더 보호무역주의로 흐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외 다른 신흥국가들의 저렴한 노동력을 활용하고자 하는 미국의 기업들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으며, 영국의 브렉시트는 이민이 통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미국은 2차 대전 이래로 글로벌 제도와 기관들을 설립하고 지원했다. UNIMF를 설립했으며 마셜플랜을 통해서 오늘날의 EU의 원형을 제시했다. 미국은 자국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다른 국가들을 지원했지만, 동시에 이들 국가 역시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이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모든 국가들은 점점 더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영국의 가장 유명한 선거 캠페인 중 하나. 1931년: 직장을 갖도록 도와주세요 1935년: 직장을 잡았습니다.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현재까지는, 자본 시장에서는 트럼프에 대해 호의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다. 자본 시장에서는 멕시코와의 국경에 담장을 쌓고 중국산 제품의 수입을 규제하는 것 보다는 감세와 대규모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통해 미국의 성장 잠재력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한 가지 안 좋은 전망은, 모든 국가들이 트럼프가 하는 것과 유사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이 시나리오가 현실화 되면, 비틀거리고 있는 세계 경제는 세계 무역의 쇠퇴를 초래할 것이며, 세계 무역의 쇠퇴는 또 다시 자국 우선주의를 유발할 것이다. 이는 자기 실현적 예언과 비슷하다. 사람들은 권위주의, 포퓰리즘 그리고 보호주의에서 답을 찾으려 할 것이고, 만일 어떤 국가가 가시적인 성과를 보인다면, 다른 국가들도 이를 따르려는 압력이 높아질 것이다.

 

이 같은 전망은 너무 비관적인 전망일지도 모른다. 세계 경제는 연 3%이상의 안정적인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으며, 영국과 미국에서 실업률은 2008년의 절반 수준에 불구하며, 저유가 덕분에 인플레이션 압력이 낮아지며, 전체적으로 물가가 낮게 형성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화의 두번째 시대, 즉 자본과 상품 그리고 노동력의 자유로운 이동을 주도했던 세계화에 대한 지지가 왜 붕괴되기 시작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리 어렵지 않은 설명이 존재한다. 냉전 종식 후 등장한 자유주의 경제 체제의 승자들은 1920년대의 자본가들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약자들을 돌아보는데 소홀했다. 세계화의 물결은 모든 경제 주체들에게 번영을 가져다 주지 못했으며, 스스로 소외되었다 여기는 자들은 세계화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에 대한 자랑을 듣는데 지쳐버렸다.

 

1930년대는, 경제에 어떠한 불가능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시대였다. 주류 경제학 이론에 대한 거친 반동이 있었고, 이는 오늘날에도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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