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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대화재와 은행들

category # 역 사 8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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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지진과 화재로 인해 샌프란시스코의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뉴욕이 북미의 금융 중심지라고 생각한다. 미국인들의 대다수가 JP 모건이 미국 금융계의 아버지라고 생각한다. JP 모건의 뉴욕이 미국의 현대적 은행산업의 기초를 닦은 곳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미국의 현대적 은행산업을 태동한 곳은 바로 샌프란시스코였다.

 


미국의 은행골드러쉬 이전



 

식민지 시대에는 미국을 위한 은행이 없었다. 신대륙 미국에서 운영되는 은행은 전부 영국인들의 소유였으며, 식민지에다가 은행의 본사를 설립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등의 많은 규제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미국의 독립 이후 알렉산더 해밀턴은 미국 최초의 은행 개설을 위해 로비활동을 벌였다. 필라델피아에 본사를 둔 Bank of North America 1781에 의회가 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설립되었다. 그로부터 50년 동안 미국에서는 정부 소유 은행 외에도 거의 1,000여개의 민간은행이 문을 열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의미는 아니었으며, 일부 상인들을 위한 은행이었다. 대게 상인들의 가게 안에 위치해 있었으며, 사업적 거래를 위한 신용을 제공해주는 역할을 했다.



 


골드러쉬와 웰스 파고



 

미국 최초의 현대식 은행이 설립된 것은 골드러시가 시작된 후였다. 거의 25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동부에서 캘리포니아로 몰려왔고, 누군가는 여기서 사업기회를 포착했다.

 


1850, 뉴욕 주 출신의 헨리 웰스와 윌리엄 파고는 특급 우편 회사(훗날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를 샌프란시스코에 설립하였다. 이 회사에서는 금광 채굴업자들이 캐온 금을 현금으로 바꿔주는 일을 했다.

 

광부들은 안전한 운송회사를 소유한 웰스 파고에 금을 맡겼다. 이 금은 역마차를 통해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웰스파고의 본점으로 이송되었고, 금화로 주조되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금을 쫓아 캘리포니아로 이주하면서, 웰스 파고는 캘리포니아 곳곳에 지점을 열었다. 1905년이 되자, 웰스피고는 서부 전역에 지점을 보유한 미국 최고의 은행으로 부상하였다.

 

웰스 파고의 지점에서는 단순히 광부에게서 금을 받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신용까지 제공했다. 웰스 파고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소비자 금융회사가 아니었고, 당시 미국인들 역시 대부분은 은행계좌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Bank of Italy – 캘리포니아의 은행



최초의 뱅크 오브 이탈리의 영업점 모습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1904 10 17일 바뀌기 시작했다.

 

청명했던 10월의 아침 9시에, 아마데오 지아니니는 조수 Vic 카그리에리에게 지시하여 영업장 문을 열도록 했다. Bank of Italy가 영업을 게시한 것이었다.

 

아마데오 지아니니는 음식 사업에서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러나 1904년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일반인들을 위한 은행이 필요하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래서 지아니니는 15만달러를 투자하여, 노스 비치 근처의 상가를 빌려 Bank of Italy의 사업을 시작했다.

 

뉴욕에서 JP 모건이 대기업들을 상대하면서 막대한 부를 버는 동안 지아니니는 기업들을 상대하지 않았다.

 

“이 은행은 민주주의의 진정한 정신의 표출이라는 점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른바 평범한 사람들이 이 은행을 만들었음으로, 영원히 이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자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이는 Bank of Italy의 첫 번째 광고물에 인쇄된 문구였다. 또 다른 광고는 월스트리트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을 들어내고 있다. “소액 계좌 환영! 오늘의 작은 예금주는 미래의 큰 부자가 됩니다.”

 

뉴욕에서 JP 모건은 세계에서 가장 큰 은행을 일구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거머쥐었다. 반면 샌프란시스코의 아메데오 지아니니는 그 반대였다. 그는 스스로에게 매우 적은 연봉을 책정했으며, 배당금도 받지 않았을 뿐더러, “저는 부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도 돈을 소유하지 못합니다, 실은 돈이 사람들 소유하는 것이죠라 하며 돈을 밝히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 대화재 그리고 뱅크 오브 아메리카



1906, 웰스 파고가 서부에서 가장 큰 은행으로 자리메김하고 아메데오 지아니니가 은행을 개업한지 채 2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 샌프란시스코에 대규모 지진이 일어났다. 이 지진으로 인해 대화재가 발생했고, 샌프란시스코의 거의 모든 건물이 파괴되었다.

 

1906년의 화재는 도심지에 있던 은행들을 완전히 파괴했다.


특히 당시 샌프란시스코의 모든 은행들은 이 대화재의 중심에 모여있었다.

 

은행들은 모든 영업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누구도 금고에 넣어둔 금과 화폐가 안전한가를 확인하기 위해 들어가볼 생각조차 못했다.

 

웰스파고의 회장은 뱅크런을 막기 위해 모든 예금주들에게 전보를 보냈다.

 


Building destroyed. Vaults intact. Credit Unaffected.

빌딩은 파괴되었습니다. 금고는 손상되지 않았습니다. 신뢰는 영향 받지 않습니다.




당연히 당시 웰스파고 측에서는 확실히 알고 있던 것은 첫 번째 문장밖에 없었다. 실제로 금고가 안전한지, 보관하고 있던 금과 화폐, 장부가 모두 안전한지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웰스파고가 예금주들을 안심시키려 하고 있는 동안, 지아니니는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오전 5 12분 지진이 강타한 직후, 샌프란시스코 전체가 탈출하려하는 동안 지아니니는 불이 퍼지기 시작한 도시로 달려갔다. 그의 명령에 따라 소집된 은행직원들은 Bank of Italy의 금고로 달려가 할 수 있는 한 금과 현금 그리고 장부 등 모든 것을 가지고 나왔다.

 

이미 막대한 부를 가지고 있던 지아니니에게 사업을 지키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행동은 명예를 위한 것이었다. 단지 그를 믿고 맡긴 예금주의 돈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화재가 발생하고 1주일만에, 샌프란시스코의 모든 은행가들이 모여 회의를 열었다. 모든 은행가들이 최소 반년이상 은행의 문을 다시 열지 않기를 원했다. 사람들은 샌프란시스코가 1년 후에도 존재할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러나 지아니니는 달랐다. 친구에게 철제 책상을 빌려 부둣가로 가서 Bank of Italy의 영업을 다시 시작했다. 대화재가 발생한지 겨우 몇일이 지났고, 아직도 시내 곳곳이 불에 타고 있었지만, 지아니니는 도시를 재건하기 위해 대출을 집행했다. 그는 도시를 재건하고 또 은행계좌가 필요한 모든 이들에게 은행 서비스를 제공할 것을 굳게 결심했다.

 

샌프란시스코가 재건된 후, 지아니니는 Bank of Italy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1918년에 이르자 Bank of Italy는 캘리포니아에 24개에 이르는 지점을 냈다. 그리고 1928년에는 292개로 늘어났다. 동시에 지아니니는 로스 엔젤레스의 Bank of America라는 작은 은행을 인수했고, 은행 전체의 브랜드를 Bank of America로 변경하였다.

 

일반인들도 은행 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지아니니의 믿음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Bank of America를 만들었다. 


Bank of America가 성공적으로 소비자 금융에 자리 잡는데는, 미국의 연방정부의 정책 역시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이 국가의 부유한 은행들의 자원을, 방방 곳곳으로 퍼트려야 합니다. 은행에 대한 접근성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농부들과 상인에게 그리고 지방을 위한 신용을 확대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은행의 지점주의를 확대했다. 지아니니에게 이는 복음과도 같은 소리였다. 그는 할 수 있는 한 지점을 최대한 많이 설립했고, 월스트리트의 은행들이 융자를 거부하는 소상공인들에게 대출을 확대하였다. Bank of America의 초기 고객 중 한명은 캘리포니아에서 와인, 영화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자금압박을 겪고 있던 작은 사업가였는데, 그의 이름은 바로 월트 디즈니였다.


지아니니는 공격적인 프랜차이즈 모델을 추구했는데, 할수 있는 한 모든 주와 모든 도시에 지점을 설립하려 했다. 그리고 각 주의 규제 당국과 은행 로비스트들은 마치 오늘날 각 국가와 도시에서 우버를 대하는 것처럼 거세게 반대했다. “캘리포니아에는 무솔리니가 필요 없습니다.” 이는 캘리포니아 주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계였던 지아니니에 대한 흑색선전이었다.

 

아무튼 이런 공격적인 확장 덕분에 1945년에 이르자 Bank of America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은행이 되었다. 전통적인 은행과 달리, Bank of America는 분산화를 추구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Bank of America의 어떤 지점도 동일한 시스템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지역에서 결정하고, 지역의 고객에 봉사하며, 빠르고 저렴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Bank of America의 성공 비결이었다.



 


오늘날의 샌프란시스코



최근, 샌프란시스코는 다시 은행계의 혁신의 중심이 되었다. 비트 코인같은 디지털 통화를 통한 혁신을 추구하든, 은행 수수료와 같은 거래 비용을 줄이기 위한 혁신을 추구하든, 샌프란시스코는 헨리 웰스, 윌리엄 파고 그리고 아메데오 지아니니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금융 혁신의 허브로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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