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728x90
반응형

2차대전의 가장 암울했던 시절, 워싱턴에 희망을 가져다준 처칠의 백악관 방문





미국이 2차대전에 참전한 바로 그 순간, 대영제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이 백악관을 방문하였다.


1941년 12월 8일,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의회에서 '치욕의 날' 연설을 한 바로 그날 영국의 수상은 가장 중요한 동맹국과의 결속을 더 확고히 하기 위해 대서양을 건너가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현실과 새로운 사실에 비추어 전쟁 계획을 재검토 할 필요가 있습니다." 처칠의 서신을 받은 루즈벨트는 대서양을 점령한 U보트의 위협에 대해 경고하였지만 결국은 처칠의 미국 방문에 동의하였다. "백악관 방문을 환영합니다"


진주만 공습이 있은지 2주후 처칠은 워싱턴에 도창하였고, 백악관에서 3주간 머물렀다. 루즈벨트 부부와 1941년의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낸후 해가 바뀐 1월까지 대통령과 총리는 영부인을 괴롭게하였지만 결국 세계대전에서 승리를 가져다준 술과 함께하는 밤샘 회동을 가졌다. 


처칠이 백악관에 도착한 22일 아침, 백악관의 집사이였던 알론소 필즈는 대통령과 영부인의 논쟁을 목격하였다. 도리스 키언즈 굿윈의 <No Ordinary Time>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날 영부인이 대통령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나한테 말했어야죠.". 대통령이 영부인에게 처칠이 백악관에서 몇일간 머무를 예정이란 사실을 막 말한 참이었다. 


10차례의 거친 폭풍에 시달린 후 처칠을 태운 전함이 버지니아주 노퍽에 정박하였다. 처칠은 워싱턴까지 140마일을 당장에라도 달려가길 바라였다. 루즈벨트와 처칠은 원래 대서양 헌장의 초안을 작성하기 위해 4달 전에 뉴펀들랜드에서 만났어야 했다. 하지만 민족자결주의에 기반한 전쟁 후 구상과 관련된 선언의 내용이 문제였다. 두 정상은 선언을 통해 미국인들로 하여금 영국과 동맹을 맺고 전쟁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기를 바라였지만, 미국의 여론은 진주만 공습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처칠은 미 해군 항공기를 이용하여 노퍽에서 워싱턴까지 이동하였다. 루즈벨트는 워싱턴 공항에서 그를 반겼다. 처칠은 더블 브레스트 피코트와 해군 모자를 쓰고 있었고 런던대공습으로 인한 정전사태에 대비한 손전등이 달린 지팡이를 들고 시가를 문채 백악관에 도착하였다. 백악관에서 첫번째 날, 처칠은 주미대사 핼리팩스 경과 군수성 장관 비버브룩, 그리고 주치의 찰스 윌슨과 동행하였다.


윗층에서는 영부인이 안주인의 역할을 갑작스럽게 맡아 총리와 일행을 대접하였다. 그날 밤 20여명이 이야기와 유머를 교환하면서 저녁식사를 마친 후, 전쟁에 관해 이야기 하기 위해 블루룸에서 모였다. 


처칠은 2층 Rose Suite를 영국 정부의 미니 본부로 개장하였다. 전령들이 대사관으로 부터 빨간 가죽 서류가방으로 문서들을 날랐다. 영부인이 기자회견을 여는 먼로 룸에서는 전쟁상황을 보여주는 대형지도를 설치하였고, 독일과 이탈리아가 흑해에서 영국해협에 이르는 유럽 전체를 통제하고 있는 우울한 그림을 확인하였다. 히틀러의 군대는 레닌그라드를 공략하고 있었고, 일본은 필리핀과 영국령 말레이지아를 휩쓸고 크리스마스에는 홍콩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그렇기에 루즈벨트와 처칠의 회담은 매우 중요하였다. 연합국은 파시즘을 몰아내기 위해서 사기 진작과 광범위한 계획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67세의 총리는 매우 괴팍한 손님이었다. "아침 식사전에 백포도주 한잔 가져다 주게." 처칠이 백악관의 집사, 필즈에게 부탁하였다. "점심전에는 스카치와 소다 한잔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전엔 프랑스산 샴페인과 브랜디 한잔도 부탁하네" 아침으로는 과일과 오랜지 주스, 차 그리고 따뜻한 것과 차가운 것을 부탁하였고 백악관의 주방에서는 달걀과 토스트, 베이컨과 햄 그리고 영국산 머스터드와 차가운 고기 2점을 제공하였다.


잠옷을 입거나 중국 용이 그려진 실크가운 혹은 원피스 복장을 한 총리가 종종 백악관의 비서진들에게 종종 목격되기도 하였다. "우리는 백악관에서 격식없고 친밀하게 한 가족처럼 지내고있습니다." 어느날 밤엔 엘리자베스 여왕을 위해 더러운 땅바닥에 자신의 망토를 펼친 Walter Raleigh경처럼 처칠은 루즈벨트의 휠체어를 밀며 백악관의 식당으로 데려가기도 하였다.


처칠과 루즈벨트는 매일 점심을 같이 먹었다. 어느 오후에는, 처칠은 "곧 돌아오겠네"라고 말하며 두어시간 낮잠을 자기도 하였다. 낮시간은 저녁이후 밤늦게까지 이어질 처칠의 업무를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그는 새벽 2,3시까지 루즈벨트를 붙들고 있었고 어서 자라는 엘라노어의 눈치를 무시해가며 브랜디를 마시고 시가를 피워댔다. "그렇게 술을 많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워대면서 정상을 유지하는 사람은 처음봤습니다. 놀라웠죠." 앨라노어는 나중에 이렇게 회고하였다.



그러나 루즈벨트는 처칠과 죽이 잘 맞았다. "대통령은 영부인의 충격을 부인하지도 않았고, 그녀를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나이젤 해밀턴은 그의 저서 <The Mantle of Command: FDR at War>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그는 별난성격을 좋아하였죠. 흥미가 가기 때문입니다." 처칠과 함께하는 것을 즐거워하였지만 루즈벨트는 그의 용기를 높게 평가하였다. 대통령은 처칠을 12월 23일 100여명의 기자가 참석한 백악과 기자회견에 대동하였다. 그자리에서 5피트 6인치에 불과한 처칠은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자신의 의자위에 올라섰다.뉴욕 타임즈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는 생각보다 작았지만, 세상에 익숙한 그 얼굴에는 자신감과 결의가 그대로 드러나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처칠은 백악관의 크리스마스 트리 점등행사에 참석하였다. 전쟁중이라 공습의 위험때문에 백악관 남쪽 라파예트 공원에서 열린 행사에서 펜스뒤에 몰린 15,000여명의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웃음과 기쁨이 가득한 저녁을 아이들에게 선물합시다. 내년에 우리가 수행할 엄중한 임무로 돌입하기 전에 마음껏 즐거움을 만끽합시다."





백악관 근처 교회에서 크리스마스에 참석한 후 처칠은 다음날 있을 상하 양원 합동 의회에서 있을 연설을 하루종일 준비하였다. "우리 앞에 놓여진 임무는 우리의 능력 밖에 있지 않습니다. 고통과 시련은 우리의 인내심 보다 크지 않습니다." 




의회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승리의 V사인을 기자들에게 보이고 백악관으로 돌아온 처칠은 흥분하고 또 안도하였다. 그날 밤 방에서 처칠은 가슴과 팔에 고통을 호소하였다. 가벼운 심장마비었다. 그의 주치의는 고심 끝에 처칠이 너무 과로하고 있다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두려움없이 처칠은 12월 30일 오타와까지 기차로 이동하여 캐나다 의회에서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바로 워싱턴으로 돌아와서 정상회담을 이어갔다.


1942년 신년. 처칠과 워싱턴은 워싱턴의 묘역에 참배하기 위해 버논 산에 방문하였다. 그날밤 연합국의 외교관들과 대통령의 서재에 모여 공동선언을 작성하였다. 주축국의 무조건항복 이외의 다른 협상은 없을 것이란 내용이었다. 또 그 조약에는 역사적인 조항이 담겨있었다. 루즈벨트의 제안에 따라  "국제연합 선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부관인 해리 홉킨스에 따르면 루즈벨트가 아침에 갑자기 그 이름을 떠올리고 처칠의 방으로 휠체어를 끌고갔다. 처칠이 목욕탕에 있다는 비서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루즈벨트는 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했고, 목욕 매트 위에 나체로 서있던 처칠을 보고말았다. "신경쓰지 마세요." 루즈벨트는 물러나야했다.


혹자는 처칠이 "대영제국의 총리는 미합중국의 대통령에게 아무것도 숨기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하지만 이는 간접적으로 전해질 뿐이다. 훗날 루즈벨트의 전기작가 로버트 셔우드가 물었을때, 처칠은 그런 말을 한적이 없으며 대통령께서도 이는 사실이 아님을 알고 계실것이라고 대답하였다. 


플로리다에서의 5일간의 휴식을 가진후 처칠은 1월 10일 정상회담을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3주간의 방문은 전쟁수행을 위한 노력에 매우 유익하였다. 처칠과 루즈벨트는 연합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몇 가지 전략에 합의를 하였다. 처칠은 미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복수심에도 불구하고 두 정상이 뉴펀들랜드에서 합의한대로 독일을 먼저 상대하는데 루즈벨트가 동의함에 안도하였다. 또한 1942년에 북아프리카로 진격하기로 하였으며, 이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대한 연합군의 상륙작전에 효과적일 전주곡이었다. 루즈벨트의 주장에 따라 처칠은 워싱턴의 사령부와, 유럽과 아시아의 연합군 총사령부의 지휘관이 전쟁계획을 조정하는것에 동의하였다. 이 합의는 영국의 지휘관들을 당황하게 하였지만 처칠은 수상대리를 맡고 있는 아틀리에에게 이미 합의는 끝났다며 비난을 차단하였다.


1942년 1월 14일 버뮤다를 경유하는 항공편으로 미국을 떠났다. 타임지의 편집장은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처칠의 미국방문은 전쟁의 전환점이었다. 그의 선견지명과 결단력에 대한 찬사는 아무리 해도 부족하다." 


매일 밤 이어졌던 격무는 루즈벨트와 백악관 스태프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홉킨스는 잿빛이 된채로 해군병원에 입원까지 했다. 그러나 총리와 대통령사이의 유대감과 전쟁에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은 강해졌다. 루즈벨트는 처칠이 떠난 후 조용해진 백악관에서 처칠과의 동료애를 그리워하게되었다. "당신과 같은 시대에 살아서 영광입니다." 루즈벨트는 역사에 길이남을 그들의 우정을 예견하는 전보를 런던으로 보냈다. 


The Darkest Hour - 어둠의 시간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