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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MY Lolaire 침몰 사건


HMY LolaireHMY Lolaire


세계 1차대전이 끝나고 2개월이지난 1919년 1월 1일, 거센 바다와 전쟁의 포화속에서 살아남은 영국 수병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마지막 항해에서 목적지 루이스 섬에 거의 도착할 무렵 비극적인 사고가 일어났다.

 

수병들이 타고 있던 배는 호화 요트 HMY Lolaire였다. HMY Lolaire 1881년에 건조되었는데, 그 뜻은 게일어로 독수리를 뜻한다고 한다. HMY Lolaire호는 1차대전 중 기관총과 포를 장착하고 대잠 및 초계 작전을 수행했다.

 

병사들의 고향이었던 루이스 섬과 해리스 섬은 1차 대전 기간 동안, 3만명의 주민 중 무려 1/5이 희생되었다. Lolaire 호에 타고 있던 수병들은 가족과 함께 새해 기념 파티를 갈망하던 운이 좋은 축에 속했다.

 

그러나 가족과의 해우를 눈 앞에 두고, Lolaire호는 짐승바위(Beasts of Holm)이라 알려진 수중 암초에 충돌하고 말았다. 원래 Lolaire호의 정원은 100명이지만, 그 당시 배에는 300명이 넘는 승객들이 탑승해 있었다.

 

배에 있던 구명조끼는 80, 구명보트는 2척에 불과했다. 원래 HMY Lolaire 호는 스토노와 항에 정박할 예정이었지만, 짙게 깔린 해무 때문에, 항구 입구에 있던 암초를 들이박고 빠르게 침몰했던 것이다. 해안가와의 거리는 고작 1KM정도에 불과했다.

 

205명의 승객들이 사망했고, 구조대가 던진 밧줄을 잡고 40명이 구조되었으며, 39명은 스스로의 힘으로 해안가까지 헤엄쳐 왔다.

 

1월 8일 해군의 사고조사 보고서가 나왔지만, 1970년까지 민간에 공개되지 않았다. 훗날 공개된 보고서에 따르면 생존한 장교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누구에게 그 책임을 돌려야 하는지 알 수 없다.”였다.

 

공식적, 비공식적 차원에서 수많은 조사가 있었지만, 이 사고의 책임소재가 누구에게 있는지 밝혀내지 못했다. 날씨는 항해가 불가능할 정도로 나쁘지는 않았지만, 항해 책임자는 항구에 접근하면서 속도를 줄이거나 더 많은 구명보트를 준비했었어야 했다.

 

오늘날, HMY Lolaire호가 침몰한 사고 위치에는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들은 가장 험난한 전쟁에서 생존했지만, 평화의 기쁨을 채 누려보지도 못하고 안타까운 사고로 눈을 감아야 했던 아이러니한 비극의 희생자들이었다. 




USS Akron 추락사건


USS AkronUSS Akron


독일의 그 유명한 비행선 힌덴부르크 호에 깊은 인상을 받은 미국은 2개의 거대 비행선을 건조하였다. 이 비행선의 길이는 239M에 달했으며, 한번의 급유로 16,900KM를 비행할 수 있었다.

 

이 중 한 비행선의 이름이 바로 미 해군이 1931년 인수한 USS 아크론이었다. USS 아크론의 임무는 장거리 초계로 함대의 작전을 보조하는 것이었다. 여러 번의 실험 끝에 USS 아크론에는 스패로우호크 복엽 정찰기의 비행중 발진 및 회수 시스템이 탑재되어 일종의 항공모함의 역할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USS 아크론의 초계 비행중 사고가 발생했다. 1933 4 4, 이른 아침 USS 아크론은 뉴 저지 연안을 초계하던 중 폭풍을 만나 꼬리 부분이 수면에 부딪혔다.

 

이 사고로 인해 USS 아크론은 빠르게 붕괴되기 시작했다. 비극적이었던 것은 비행선에는 구명조끼도 없이 단 하나의 구명보트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총 76명의 승조원 중 73명이 익사하거나 저체온증으로 사망했다.

 

물론 사고의 가장 큰 원인은 기상 문제였지만, 기장이었던 Frank McCord 대령도 책임을 피하지 못했다. 낮은 고도로 비행하고 있던 USS Akron은 기장의 지시에 따라 상승을 시도했지만, 비행선의 길이를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USS 아크론의 자매함이었던 USS Macon 역시 1935년 캘리포니아의 해안가에서 추락했다. 다행히 희생자는 2명에 불과했지만, 2건의 사고로 인해 미군에서는 비행선을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계획을 폐기하게 되었다. 


슌요마루호의 비극


 슌요마루호슌요마루호

2차대전의 일본제국군은 포로들에게 가혹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수송선박의 부족으로 인해, 동남아 각지에서 포획된 전쟁 포로들은 일본의 구식 화물선을 통해 이송되었다. 문제는, 일본군이 이 화물선에 제네바 협약에서 규정한 적십자 표지를 부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네바 협약에 따르면 포로 수송선에는 적십자 표시를 부착하여 오인공격을 방지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2차대전 기간 중 일어났던 가장 큰 해상 재난은 바로 여기에서 기인한다.

 

1944 9 18, 슌요마루호는 인도양에서 영국 해군 잠수함인 HMS Tradewind에 의해 어뢰공격을 맞고 격침되었다. HMS Tradewind는 슌요마루가 무엇을 싣고 가는지 알지 못했다. 6,500명에 이르는 네덜란드, 영국, 미국, 호주인들과 일본의 강제 징용자들이 슌요마루호에 타고 있었으며, 이 중 5,620명이 사망했다.

 

슌요마루는 이들을 싣고 바타비아(오늘날 자카르타)에서 파당까지 자바섬의 서해안을 따라 북상 중이었다. 포로들과 강제 징용자들을 수마트라 철도를 부설현장으로 이송 중이었던 것이다.

 

수송선의 환경은 극히 나빴다. 수 많은 사람들이 대나무 우리에 빽빽히 들어 차 있었으며, 일본군만이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고, 포로에게 배당된 구명보트는 단 2개에 불과했다.

 

더 비극적이었던 것은, 이 지옥속에서 간신히 생존했던 700여명의 포로들 조차, 구조되는 즉시 그대로 수마트라 철도 부설공사에 끌려갔다는 것이다. 이들 중 전쟁 종료때까지 생존했던 인원은 단 100명에 불과했다. 


MV Wilhelm Gustloff호 침몰사건


 MV Wilhelm Gustloff호MV Wilhelm Gustloff호

독일의 나치 정권은 독일인들에게 국가 사회주의 정권하의 삶의 질이 매우 높다는 점을 선전하기 위해 국가가 통제하는 레저 기구를 설치하였다. 독일의 노동자들은 MV Wilhelm Gustloff를 타고 휴일마다 여행을 떠났다. 1930년대 가장 규모가 컸던 이 단체 관광은 “환희를 통한 힘 (Kraft durch Freude, KdF)" 프로그램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세계 제 2차대전이 시작하면서 이 프로그램도 중지 되었다. 그러다 1945, Wilhelm Gustloff한니발 작전에 투입되었다. 이는 소련의 붉은 군대가 프러시아 지역까지 진군하면서 해당 지역의 독일 민간인과 군인 1백만명 이상을 철수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 중 4000여명의 어린이를 포함한 1만여명의 시민들이 정원 1800명인 Wilhelm Gustloff에 필사적으로 올라탔다.

 

1945 1 30일 한밤 중, Wilhelm Gustloff는 출항했다. 당시 빌헬름 잔 사령관은 해안을 따라 조명을 끄고 항해하는 것이 최선이라 조언했지만, 함장 프리드리히 페테르센 대령은 원양 항해를 지시했다. 항해하던 중 함장은 배의 진행방향에 독일군 소해정이 있음을 뒤늦게 발견하고 배의 위치를 알리기 위해 항해등을 점등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이 선택은 비극이 되었다. Wilhelm Gustloff에는 대공포가 탑재되어 있고 군인들도 타고 있었으므로 전투함이 아니라는 것을 표시하는 적십자 마크를 달고있지 않았다. 해당 수역에서 초계중이던 소련의 잠수함 S-13은 어둠속에서 목표를 포착하고 어뢰 3발을 발사했다.

 

바로 대규모 구조작전이 실행되어서 1230여명을 구출할 수 있었지만, 9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발틱해의 차가운 바다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는 단일 선박 침몰 사고로 인해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사고였다. 




Harrow & Wealdstone 열차 충돌사건


Harrow & Wealdstone 열차 충돌사건Harrow & Wealdstone 열차 충돌사건


1952 10 8일은 영국에서 가장 끔찍한 기차사고가 났던 날로 기억된다. 1915년 제 1차 대전 기간 중 Gretna Green 참사에서 227명의 스코틀랜드 병사들이 사망한 이후 최대 규모의 기차 사고였다.

 

Harrow & Wealdstone 기차 사고는 3대의 기차가 충돌했다. Tring에서 출발한 지역 통근 기차, 안개때문에 연착했던 Perth 야간 특급 열차 그리고 Euston에서 온 특급열차였다.

 

Perth발 야간 특급열차의 운전기사는 “주의”를 뜻하는 황색 신호가 켜졌는데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지나쳤다. 아마 기상 때문에 신호를 못 보았을 것이다. 또 바로 뒤에 켜졌던 “정지” 신호도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그리고 브레이크를 밟은 건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한편, Tring에서 온 통근기차는 Harrow & Wealdstone역에서 승객들을 태우고 있었다. Perth발 야간 특급 열차는 약 시속 80Km 속도로 정거장에 있던 통근기차를 그대로 들이박았다. 그러나 사고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맞은편에서 빠른 속도로 접근하던 Euston발 특급열차가 최초 충돌로 발생한 잔해에 부딪혀 탈선한 것이다.

 

16개 객실이 파괴되었으며, 이 중 13개의 객실은 총 길이 41m, 16m 높이 9m로 심하게 압축되었다. 304명이 상해를 입었고, 102명이 현장에서 즉시 사망했으며, 10명이 중상을 입고 병원에서 사망했다.

 

정확한 사고원인과 책임소재를 규명하기는 쉽지 않지만, 짙은 안개와 잘 보이지 않았던 신호 그리고 구식 설비들이 사고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설비들은 모두 작동하고 있었고, 운전 기사들은 경험이 많았다. 사고를 막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이들을 뒷받침해줄 최신 시스템이었다.

 

이 사고로 인해 영국 철도에서는 자동 경고 시스템 도입을 서둘렀다. 이 시스템은 운전기사들이 신호를 보았는지와 상관 없이 브레이크를 자동으로 작동시켜주도록 하는 것이다. 


USS Thresher 침몰


USS ThresherUSS Thresher

USS Thresher미 해군의 첫번째 공격 원자력 잠수함이었다. USS Thresher 1961년 첫번째 시운전을 가졌고, 새로운 기술 시스템을 시험하기 위해 수차례의 테스트를 거쳤다. 나중에 닥쳐올 재난을 예고하듯, 이 테스트 중 핵 반응로와 발전기가 멈추어 선체의 온도가 급격하게 상승해 승조원들이 비상탈출을 해야 했다.

 

1963년 4월 10일, 대서양 Cape Cod 인근에서 훈련중이던 USS Thresher는 갑작스럽게 해저로 침몰하며 산산조각났다. 129명 승무원 전원이 사망했다. 이중 17명은 민간인이었다. 사고를 조사하던 중, 엔진룸 안의 이음매에서 구멍이 발견되었다. 아마 누수가 발생해 전자 제어 시스템의 회로에서 누전이 발생해 수면으로 부상이 실패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USS Thresher는 침몰을 막을 수 없었고, 수압으로 인해 완전히 찌그러졌다.

 

이 사고로 인해, 미 해군은 핵잠수함 건조 과정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SUBSAFE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벌크선 MV Derbyshire 침몰


  MV Derbyshire MV Derbyshire

영국의 MV Derbyshire는 바다에서 침몰한 가장 큰 벌크선이다. 1976년에 건조된 MV Derbyshire는 길이 281M, 폭 44M, 높이 24M의 당시 최대규모의 벌크선이었다. MV Derbyshire는 캐나다에서 15만톤의 원석을 싣고 1980년 7월 11일 마지막이 될 항해를 시작했다. 44명의 승조원이 타고 있던 MV Derbyshire의 목적지는 일본이었다.

 

9월 9일 혹은 10일, 태풍 오키드가 동중국해를 항해하던 MV Derbyshire를 강타했다. 문제는 MV Derbyshire의 흔적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구조요청도, 신호도 전혀 없었다. 공식적인 조사는 7년 후인 1987년 실시되었다. 어떤 구조적, 시스템적 문제가 없었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유족들은 이 조사결과를 믿지 못하고, 더비셔 가족 협의회 (Derbyshire Family Association, DFA)를 결성하고 진실을 찾기 위해 시도했다. 간신히 자금을 확보한 DFA 1994년 해저 4000M에 있던 Derbyshire의 잔해 일부를 찾았다.

 

DFA는 계속해서 조사를 진행했고, 그 결과 선박안전 기준이 강화되었다. 1970년대에는 매년 17척이 넘는 벌크선이 침몰했으나, 오늘날 그 수는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비하르 열차 사고


비하르 열차 사고비하르 열차 사고


1981년 6월 6일, 인도 비하르 주에서 1,000명이 넘는 승객이 9개의 객차에 탑승한 기차가 달리고 있었다. 인도의 6월은 우기였고 엄청난 비가 내려 기찻길은 매우 미끄러웠고, 강은 크게 불어났다.

 

사고의 원인으로 지적된 것은 기관사였다. 기관사는 철도위를 지나가고 있던 소때들을 발견하고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힌두교에서 소는 신성한 동물이었고, 기관사는 열렬한 신자였다. 비 때문에 열차는 쉽게 멈추지 못했고, 결국 탈선해 다리 아래 바그마티 강으로 추락했다.

 

폭우로 인해 물살은 매우 빨랐고, 크게 불어나 있었다. 다리 아래로 추락한 열차는 빠른 속도로 가라앉았고, 대규모 구조대가 투입되어 대대적인 구조활동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600명 이상의 승객들이 사망했고, 300명이 실종되었다. 


Ufa 열차 폭발 사고


Ufa 열차 폭발 사고Ufa 열차 폭발 사고


1980년대는 공산당의 지배적인 위치를 유지하고 무너지는 체제를 붙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미하일 고르바초프에게 매우 힘든 시기였다. 동시에 수많은 재난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면서 소련의 국가 기반시설이 매우 노후화되고 위험하다는 사실을 감출 수 없게 되었다. 그 중 가장 심각했던 재난이 1989 6 4일 일어났다.

 

우랄산맥 근처 Ufa라는 도시에 승객을 가득 태운 2대의 열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철로 옆 파이프라인에서는 구멍이 생겨 가연성 가스가 유출되고 있었다. 기차가 지나가면서 스파크가 튀었고, 대규모 폭발이 일어났다. 7량의 객실이 완파되고, 37량이 객실이 피해를 입었다.

 

500여명 이상의 승객들이 즉사했고, 이들 중 대부분은 연휴를 맞아 흑해의 휴향지에서 휴가를 보내러 가던 어린이들이었다. 폭발의 규모는 TNT 10Kt정도로 추정되었는데, 이는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폭탄의 폭발력과 비슷한 규모였다. 폭발로 인해 1.6km에 달하는 화염구가 형성되었고 반경 4Km내 모든 나무가 불타버렸다.

 

철로를 따라 설치되어 있던 파이프라인은 프로판 가스, 부탄 및 탄화 수소로 가득차 있었고, 액화 상태로 운반하기 위해 엄청난 압력이 가해지고 있었다. 6 4일 아침, 압력이 감소되고 있다는 것이 감지되었는데, 당시 책임자는 즉시 이상유무를 확인하는 대신, 더 많은 가스를 보내 압력을 높였다. 결과적으로, 공기보다 무거운 프로판 가스가 누출되어 철도를 따라 넓게 깔렸다. 그리고 열차가 통과하면서 스파크가 튀었다.

 

소련에서의 다른 많은 재해와 마찬가지로 Ufa 열차 사고는 신속하게 마무리 되었다. 소련정부가 최소비용으로 최대한 빨리 마무리 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이 파이프라인은 그 전 3년동안 50번 이상의 가스 유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 석유부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더 심각했던 것은, 철도 관제사에게는 가스 유출에도 불구하고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운행을 중단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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