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프랑스군을 사열하는 드골과 처칠
프랑코-브리티쉬 연합(불영연합국)
2차대전, 나치가 전격전을 통해 프랑스를 완전히 박살내고 있던 1940년 6월 16일,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과 프랑스의 국방부 차관 샤를 드골이 런던의 찰튼 클럽에서 만나 점심회동을 가졌다. 각각 영국과 프랑스의 애국심과 투쟁심의 상징이었던 이 두 인물은, 이 날 충격적인 합의를 했다.
영국과 프랑스를 “프랑코-브리티쉬 연합(Franco-British Union)”이라 명명한 하나의 국가로 합치겠다는 계획에 동의한 것이다.
이는 영국과 프랑스 군인들이 독일군에게 포위된 덩케르크에서 기적적으로 철수를 성공한지 2주째 되는 날이었다. 덩케르크 철수는 세간에 널리 알려졌지만, 오랜 역사동안 라이벌이자 동맹으로 애증의 관계에 있던 영국과 프랑스가 하나의 국가로 합친다는 놀라운 계획은 거의 잊혀졌다.
그러나 거의 성사 직전에 있었던 이 이야기는 EU의 기원과, 브렉시트로 알려진 영국의 EU 탈퇴 이유를 동시에 설명해주는 좋은 역사적 사례가 될 수 있다.
영국과 프랑스를 하나의 국가로 합치겠다는 계획은 2차대전이라는 위기에서 시작되었다. 1940년 5월 10일, 나치 독일은 프랑스에 대해 무자비한 전격전을 실시했다. 그리고 채 1달도 되지 않아, 프랑스의 저항은 완전히 분쇄되었다.
프랑스에서는 패배감이 널리 퍼졌는데, 이를 만회하여, 해외 영토에서 힘을 모으고 남아있는 함대가 독일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분위기 전환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온 계획이 영국과 프랑스를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계획은 뜬금없이 갑작스럽게 나온 것은 아니었다. 유럽의 국가들을 하나로 통합한다는 구상은 이미 유럽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논의되었다. 물론 언제나 비 현실적이라는 이유로 실행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나치라는 전대미문의 위협 덕분에 이 비현실적인 계획이 공식적인 정책으로 채택되었다.
6월 14일, 독일군이 파리를 접수했다. 그 후 48시간 동안, 영국과 프랑스의 관료들은 “프랑코-브리티쉬 연합 선언”의 초안을 작성했다. 이는 전시 동맹 혹은 오늘날 EU 같은 부분적인 통합 계획이 아니었다. 목표는 통합된 하나의 국가를 만드는 것이었다.
선언 초안에는 “현대 세계의 가장 운명적인 순간에 연합 왕국과 프랑스 공화국 정부는 영속적인 연합을 결성하여 인류를 노예로 삼는 제도에 대항하여 정의와 자유를 지키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경주할 것임을 선언한다.”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즉, “프랑스와 영국은 서로 다른 분리된 국가가 아니라 ‘프랑코-브리티쉬 연합’이라는 하나의 국가로 재 탄생’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 순간에 양국의 제도와 전통이 변화를 겪게 될 것이었다. 국방, 외교, 금융, 경제 정책에 대한 양국의 공동 관리가 실행 될 예정이었으며, 프랑스의 국회의원들이 영국의 하원에 합석하여 공동 의회를 구성할 계획이었다 처칠의 개인 비서는 “이제 우리의 앞에 유럽 연방 혹은 세계 연방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다리가 놓여져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계획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6월 16일 처칠은 개인적으론 회의적이었지만, 이 구상을 영국 내각에 공개했다. 내각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처칠은 회고록에 이렇게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경험 많은 노회한 정치인들이 정당에 관계 없이 이 원대한 구상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 구상이 내포하는 의미와 결과에 대한 생각은 하지도 않고 말이다.”
처칠은 개인적인 의구심을 배제하고 내각에 이렇게 말했다.
“오늘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우리는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비난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샤를 드골 역시 국가로서의 프랑스가 사라지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채, 이날 아침 런던에 도착했다. 그러나 드골은 이 계획을 역사의 궤적을 바꿀 위대한 진보라 생각했다.
오후 4시 30분, 드골은 프랑스의 총리 폴 레노에게 전화를 걸었다. 폴 레노는 독일군의 진격을 피해 프랑스에서 투르로, 투르에서 보르도로 도망 다니고 있었다. 레노는 ‘프랑코-브리티쉬 연합’에 대해 큰 흥미를 보였다. 프랑스를 구원할 희망을 본 것이다.
폴 레노는 이 것이 영국정부와 공식 합의 된 것인지에 대해 드골에게 따지듯 물었다. 그러자 드골은 전화기를 처칠에게 넘겼다. 처칠은 레노에게 ‘프랑코-브리티쉬 연합’에 대해 확언을 주었다.
통화 후, 처칠은 런던에서 각 정당의 주요 지도자들과 함께 열차에 탑승해 이동하면서 새로운 역사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열차는 해안가를 향하고 있었고 그 곳에서 배를 타고 도착한 프랑스 정부의 대표를 만나 “연합 법, Act of Union”에 서명할 예정이었다.
페탱과 비시정부
그런데 열차는 역에서 멈추지 않았다. 영국과 프랑스를 통합하겠다는 계획은 그 등장만큼이나 빠르게 붕괴되었다. 6월 16일 하루 전, 프랑스 정부는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동시에 영국에 대한 배신감도 크게 느끼고 있었다. 덩케르크 철수 작전 중 10만 명이 넘는 프랑스 군인이 영국군과 함께 탈출하는데 성공했지만, 동시에 수만명의 프랑스군이 그대로 남겨져 독일에 항복해야 했기 때문이다.
레노는 연합 법을 국무회의에 상정했지만, 국무회의에서는 이를 프랑스를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영국의 계획이라며 통과되지 못했다. 동시에 1차 대전의 영웅이었던 84살의 페탱 원수는 프랑스의 완전한 붕괴를 막는 것이 본인의 역할이라 생각하고 독일과의 휴전에 동의했다.
페탱과 히틀러
페탱이 말하길 “영국의 끝은 정해져 있고, 영국과의 통합은 ‘시체와의 결합’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다른 장관의 결론은 “나치의 속주가 되는 것이 더 낫다. 적어도 그 의미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있으니까.”였다.
르노는 나중에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우리의 동맹국과 연합을 하는 것에 반대한 사람은 히틀러에게 머리를 숙이고 발이나 닦을 준비가 된 놈들이었다.”
프랑스의 번복 결정을 들은 처칠은 무거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려 다우닝가의 수상관저에서 다시 업무에 복귀했다. 몇 일 후, 페탱 원수는 프랑스 정부를 장악하고 독일과 휴전 협정을 맺었다. 영국은 다시 홀로 남겨졌다.
패배주의는 뒤늦게, 그러나 매우 강하게 프랑스 정부를 강타했다. 만약 르노가 이 제안을 단 1주일, 단 몇일이라도 빨리 프랑스 내각에 보고했다면 아마 프랑코-브리티쉬 연합은 이루어졌을 것
이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도 매우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프랑스는 계속해서 독일에 저항을 했을 것이고 비시 정부도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 연합을 다른 유럽 국가들에게도 개방했을 것이다. 독일의 침공을 받고 있던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벨기에와 네덜란드가 그 대상이 되었을 것이고, 아마 유럽 합중국(United States of Europe)의 창설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2차대전 직후 세계는 미국과 소련에 더불어 유럽 합중국이라는 또 다른 슈퍼파워의 등장으로 3강체제가 구축되었을 것이다.
프랑코-브리티쉬 연합은 실패했지만, 오늘날 EU의 근간이 된 유럽 통합 계획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다. 이 계획에 참여했던 프랑스 측 관계자 중 한명이 바로 장 모네(Jean Monnet)로 오늘날 “유럽의 아버지”로 알려진 유럽 통합 계획의 설계자이다.
모네는 “아이디어는 사라지지 않는다. 만약 전쟁 중에도 국가들이 이토록 가까워질 수 있었다면, 이를 통해 평화를 구상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라 주장했다. 1940년 모네와 그와 뜻을 함께하는 연방주의자들이 발견한 교훈은, 1945년 이후 큰 지지를 얻게 되었다. 유럽의 통합만이 한 세대만에 2번의 세계 대전을 불러온 민족주의와 군국주의의 재앙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었다.
EU와 브렉시트
프랑코-브리티쉬 연합에 대한 이야기는 통합의 필요성에 대한 강력한 증거가 되었다. 바로 위협이다. 1940년 독일의 위협은 처칠과 드골 같은 열렬한 민족주의자들에게 통합의 필요성을 일깨워주었다. 마찬가지로 1945년 이후 소련의 위협은 유럽 통합 프로젝트의 강력한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1940년의 이 해프닝은, 영국이 유럽 통합 프로젝트에 대해 왜 주저했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2차 세계 대전 기간 중 프랑코-브리티쉬 연합에 대한 기억은 빠르게 사라졌고, 그 자리에 더 매력적이고도 영웅적인 이야기가 급 부상했다.
덩케르크에서의 기적과도 같은 철수와, 영국 본토 항공전의 승리, 그리고 런던 대공습을 견뎌낸 영국인들 사이에서는 자유를 위해 고독한 투쟁을 벌이는 섬 나라라는 신화가 힘을 얻게 된 것이다.
황폐화 된 유럽 대륙과 연합을 하는 것보다,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 속에 서구 세계를 지키는 영국의 운명이 더 그럴듯하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처칠은 프랑스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이다.”
2016년, 영국은 브렉시트를 결정하기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당시 영국에는 덩케르크 정신(Dunkirk Spirit)이 지배적인 담론이었고, 프랑코-브리티쉬 연합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처칠은 프랑스와의 연합을 지지하는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브렉시트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브렉시트를 통해 처칠의 가치를 승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 보수당의 한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덩케르크 정신의 끝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EU의 밖으로 내 던질 것이다.” 1940년대의 위기는 독재와 전체주의에 맞서 유럽을 통합하려는 대담한 계획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러나 덩케르크에서의 철수는 말 그대로 영국이 유럽대륙에서 탈출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 역 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면 중국군은 개입할 수 있을까? (0) | 2017.08.25 |
---|---|
18개월 만에 핵개발 가능? 한국의 핵무장 가능성은 있는가 (1) | 2017.08.24 |
일본 항복의 결정적 요인은 핵폭탄이 아니었다. (2) | 2017.08.15 |
유럽의 아시아 정복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군사 기술이 아니었다. (0) | 2017.08.11 |
중국의 교훈에서 배우는 북핵에 대처하는 태도 (0) | 2017.08.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