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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항복의 결정적 요인은 핵폭탄이 아니었다.

category # 역 사 2017. 8. 15.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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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우리나라에서는 아니지만, 2차대전이 끝나갈 무렵, 미국이 일본에 투하한 2발의 핵폭탄은 해외에서는 꽤 많은 도덕적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1945년 당시만 하더라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하겠다는 트루먼 대통령의 결정에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1965Gar Alperovitz가 물론 핵폭탄 덕분에 전쟁이 바로 끝나는 계기가 되긴 했지만, 11월달로 계획되어 있던 미국의 몰락, Downfall’ 작전 이전에 일본은 어떻게든 항복했을 것이라 주장하며 논쟁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이미 항전 의지를 잃었기 때문에, 핵폭탄의 사용은 무의미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핵폭탄 투하가 전쟁 승리에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니었다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핵공격은 도덕적으로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이 논쟁의 요지였다. 1948년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 논쟁에 뛰어들었다. Alperovitz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 핵폭탄 투하는 도덕적이고, 필수적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다는 것이다.

 

양측 모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핵폭탄이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무기 때문에 일본이 8 9일 항복을 결심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가정했다. 양측 모두 핵 공격의 유용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전통적인 견해는 당연히 핵폭탄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미국은 8 6일 히로시마, 8 9일에는 나가사키에 핵공격을 실시했다. 일본은 마침내 핵 공경의 위협에 굴복하고 항복했다. 이 명확한 이론에 대한 지지는 굳건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3가지 문제가 있었다.




타이밍



전통적인 견해에 대한 첫번째 문제는 타이밍이었다. 타이밍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전통적인 견해는 매우 간단한 타임라인을 가지고 있었다. 미 육군 항공대가 8 6일 히로시마에 처음 핵폭탄을 투하했고, 3일 후 나가사키에 또 다시 폭탄을 투하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일본은 항복하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히로시마의 폐허히로시마의 폐허


미국 역사에서 말하는 8 6일의 히로시마는 장구한 이야기의 클라이맥스였다. 2차대전이라는 전쟁 이야기의 모든 이야기는 바로 이 순간을 위해 달려왔던 것이다. 핵폭탄 개발 결정, 로스 알라모스에서의 비밀 연구, 최초의 핵 실험, 그리고 히로시마에서의 절정으로 이어지는 이야기 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는 일본의 항복 결정에 대한 객관적이 분석이 이루어질 수 없다. 이 이야기에서는 핵폭탄이 주인공으로 이미 캐스팅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관점에서 보면, 82번째 주의 가장 중요했던 날은 8 6일이 아니라 바로 8 9일이었다. 일본 전쟁지도 최고회의는 8 9일 회의를 열고 무조건 항복에 대해 논의했다. 이 회의에는 일본 정부 최고 지휘부 6명이 참여하고 있었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이 날 전 까지만 해도 항복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연합군이 요구했던 무조건 항복은 일본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미국과 영국은 이미 유럽에서 전범재판을 진행하고 있었다. 신과 같았던 일본의 덴노(일왕)를 전범재판에 넘기는 것이 가능한 일이었을까? 덴노제를 폐지하고 정부 형태도 변화시키는 것은? 1945년 여름 이미 전황은 나빠질 대로 나빠졌지만, 일본의 지도자들은 덴노제를 포함하는 일본의 전통을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8 9일 왜 갑자기 일본의 지휘부는 마음을 바꾸었을까? 무엇이 14년간 계속된 전쟁 끝에 항복을 논의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을까?

 

그 원인은 나가사키가 아니었다. 아니, 나가사키일 수가 없었다. 나가사키에 대한 핵 공격은 8 9일 늦은 오전에 실시되었다. 이는 이미 전쟁지도 최고회의를 열어 항복을 논의하고 있던 시점이다. 그리고 나가사키에 대한 핵 공격 소식은 이날 오후에야 대본영에 보고되었다전쟁지도 최고회의는 이미 오전에 일단락 되고 결정을 내리기 위해 전체 내각을 소집한 상태였다. 타이밍을 고려한다면 나가사키는 일본 전쟁지도 최고회의가 항복을 논의해야 했던 원인이 될 수 없었다.

 

히로시마 역시 좋은 후보가 아니다.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투하된 시점인 나가사키보다 74시간 전이었다. 3일 동안 어떤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왜 일본의 지도자들은 히로시마에 핵 공격을 당하고도 3일동안이나 이를 수습하기 위해 회의를 갖지 않았을까?

 

1962 10 16일 오전 8 45, 케네디 대통령은 침대에 앉아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국가 안보 보좌관이 침실까지 급하게 들어와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 기지를 건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온 것이다. 그 후 2시간 45분 후, 특별 위원회가 창설되었고, 위원으로 발탁된 인물들을 섭외했으며 이들이 모두 백악관에 소집되어 회의가 시작되었다.

 

1950 6 25, 트루만 대통령은 미주리주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국무부 장관 애치슨이 북한이 38선을 넘어 한국을 침공했다는 보고를 올린 것은 토요일 오전이었다. 그 후 24시간 안에, 트루먼은 미 대륙의 절반을 횡단해 당시 백악관 공사로 인해 임시 공관으로 사용되었던 블레어 하우스에서 대책회의를 열었다.

 

히로시마히로시마


미국의 대통령들은, 그리고 세계 어느 나라의 지도자든, 위기가 발생하면 이에 대응하기 위해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회의를 연다. 물론 세월호 사고가 났는데도 7시간동안이나 어디서 무얼 했는지 알 수 없었던 지도자도 있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공격을 당하고도 3일 동안이나 대책을 논의하지 않았던 일본정부의 태도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히로시마가 일본 정부에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면 왜 일본의 지도자들은 14년간 계속된 전쟁에서 항복하기 위한 논의를 하기 위해 모이는데 3일이나 걸렸을까?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런 늦장 대응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핵 폭탄이라는 무기의 위력에 대해서 실감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마 나가사키에 가해진 공격이 무엇인지 몰랐을 것이고, 핵폭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핵폭탄이 가진 위력과, 가지고 올 결과를 이해했을 때, 뒤늦게 항복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여러 증거와 일치하지 않는다.

 

첫째, 히로시마현 현지사는 핵 공격 직후, 주민 1/3이 죽었고 도시의 2/3가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정부에 보고했다. 이 보고는 3일 동안 계속해서 중앙정부에 보고되었고 일본 지도자들은 핵폭탄의 위력을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일동안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둘째, 일본 육군이 준비한 히로시마 핵 공격 피해에 대한 예비 보고서는 8 10일까지 도쿄에 전달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이미 항복결정이 내려진 후였다는 것이다. 비록 구두 보고는 8 8일 육군에 보고 되었지만, 핵 공격 피해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아직 모르는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항복 결정은 히로시마의 공포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셋째, 일본 육군 역시 핵무기의 위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본 역시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었고, 히로시마에 가해진 공격이 핵무기라는 사실에 대해 보고한 관련자들이 많았다. 육군 대신이었던 아나미 고레시카는 8 7일 저녁 일본의 핵무기 프로그램 책임자와 상의하기 까지 했다. 일본 지도자들이 핵무기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8 8일 외무 대신 도고 시게노리는 스즈키 칸타로 수상에게 가서 히로시마 핵 공격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최고 위원회를 소집하도록 요청했지만, 위원회는 개최되지 않았다. 핵공격의 충격 때문에 항복하게 되었다는 주장은 8 8일 회의 소집이 거부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그리 그럴듯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인 8 9일 무조건 항복 논의가 이루어졌다. 일본의 지도자들이 단체로 정신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면, 그 사이에 무언가 다른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피해 규모



역사적으로 볼 때, 핵폭탄은 2차 대전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처럼 묘사된다. 하지만 일본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폭풍의 한가운데 있을 땐 한방울의 빗방울을 구별하기는 어렵다.

 

1945년 여름, 미 육군 항공대는 세계 역사에 길이남을 만할 공습 작전을 실행했다. 일본의 68개 도시가 공격 대상이었으며 미 육군 항공대의 목표는 이 도시들의 철저한 파괴였다. 170만명의 이재민, 30만명의 사망자 그리고 75만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66개 도시에는 재래식 폭탄이 투하되었지만 나머지 2개 도시에는 핵폭탄이 떨어졌다. 재래식 공격이 가해진 도시들의 피해는 막대했다. 공격은 여름 내내 계속되었다. 그렇기에 이 도시에 대한 개별 공격이 일본인들에게 그리 큰 인상을 주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비록 그것이 신무기에 이루어진 공격이라도 말이다.

 

마리아나 제도에서 발진한 B-29 폭격기는 표적의 위치와 비행 고도에 따라 16,000 파운드에서 20,000 파운드의 폭탄을 탑재할 수 있었다. 미군이 수행한 일반적인 공습에는 대략 500여기의 폭격기가 한번에 동원되었다. 이 말은 즉, 폭격 한번에 대략 4~5 킬로톤이 각 도시에 투하되었다는 의미이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리틀 보이 16.5kt이었고 나가사키에 투하된 팬 맨 20kt이었다) B-29 폭격기들이 투하하는 폭탄은 도시 곳곳에 떨어져 더 많은 피해를 준 것을 감안 할 때, 몇번의 폭격기 수백기를 동원한 폭격은 원폭 공격과 비슷한 파괴력을 보여주었다.

 

첫번째 대규모 폭격은 19453 9~10일 이틀동안 도쿄에 가해졌다. 이는 전쟁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단일 도시에 대한 공격이었다. 41km²가 잿더미로 변해버렸고 12만명이 사망했다. 이는 단일 도시에 대한 공격에서 발생한 가장 높은 사망자 숫자였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핵폭탄이 더 많은 사상자를 냈다는 이야기가 많다. 그래서 히로시마에서는 다른 도시에서 보다 훨씬 많은 사상자가 났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1945년 여름 미군의 폭격을 받은 68개의 도시의 사상자를 그래프에 표시해보면 히로시마는 2등이었으며, 파괴된 면적은 4위였다. 그리고 도시 면적 대비 파괴된 면적을 비교해보면 히로시마는 17등에 불과하다. 히로시마의 피해는 그 당시 미군의 일본 대공습의 일반적인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히로시마는 아주 특별하고도 특이한 케이스이다. 하지만 그 당시 일본 지도자들의 입장에서는 우리의 인식과 상당히 달랐을 것이다. 7월 말에서 8월 초까지 일본 정부의 주요 지도자들이 수십개의 도시가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7 16일 저녁에만 오이타, 히라츠카, 누마즈, 쿠와나가 공격받아 50%가 넘게 파괴되었다. 쿠와나는 도시의 75% 이상이 파괴되었고 누마즈는 쿠와나보다 더 심하게 파괴되어 도시의 90% 이상이 잿더미가 되었다.

 

3일 후, 3개의 도시가 더 공격받았다. 후쿠이는 80% 이상이 파괴되었고, 1주일 후 또 다른 3개의 도시가 밤새 공격 받았다. 또 다시 2일 후, 하룻밤에 6개의 도시가 파괴되었다. 여기에는 도시의 75% 이상이 파괴된 이치노미야가 포함되어 있었다. 8 2, 4개의 도시가 또 파괴되었고 대도시였던 토야마의 99.5%가 파괴되었다. 사실상 일본의 거의 모든 대도시가 완전히 잿더미로 타버렸다.

 

4일 후, 8 6일에 공격받은 도시는 히로시마 하나뿐이었다. 물론 피해는 매우 막대했지만, 지난 몇 주 동안 수많은 도시들이 계속해서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히로시마에 대한 공격은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나가사키에 투하된 '팻 맨'의 버섯구름


히로시마 이전 3주동안 미 육군 항공대는 일본 26개 도시에 대한 공습을 실시했다. 이 중 1/3은 히로시마 그 이상으로 파괴되었다. 1945년 여름동안 68개 도시가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히로시마의 충격이 항복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설득력을 잃는다. 히로시마가 항복의 결정적 원인이었다면, 왜 그 전 66개 도시가 파괴되었을 때 항복을 하지 않았을까?

 

만약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일본지도자들이 항복의 원인이 되었다면, 일본의 지도자들은 다른 도시들은 왜 신경을 쓰지 않았을까? 시데하라 기주로 전 외무상은 도쿄 대공습 2일 후, 일본 고위 관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분위기를 전했다. 기주로는 신민들은 점차 공습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단결심과 결의가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일본인들은 수백, 수천명의 비무장 시민들이 죽고 다치고 굶주리고 수백만 건물들이 무너지고 불타도이 고통을 견뎌야 한다고 썼다. 외교적 해결을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전쟁지도 최고회의의 일본 지휘부의 입장은 분명했다전쟁지도 최고회의에서는 소련이 중립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에 대해서는 논의 했지만, 계속되는 미군의 폭격에 대해서는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보존된 기록에 따르면전쟁지도 최고회의에서 도시들에 대한 공습은 예외적인 2번의 회의을 제외하면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1945 5월에 한번, 그리고 8 9일 밤에 있었던 회의에 한번 뿐이었다. 이 같은 기록을 고려해보면, 일본의 지휘부는 대도시에 가해진 미군의 폭격이 전쟁에서 그리 중요한 사안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 같다.

 

육군 대신 아나미는 8 13, 핵 폭탄은 지금껏 일본이 견뎌왔던 다른 폭탄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기록했다. 만약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공격이 지금껏 계속되어온 다른 도시들에 대한 공격과 그리 다르지 않고, 일본의 지휘부가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여기지 않으며 또 논의조차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핵 공격이 항복의 결정적 원인이 될 수 있을까?

 



전략적 중요성



만약 일본이 다른 도시들에 대한 폭격과 특히, 히로시마에 떨어진 핵폭탄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일본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일본은 매우 곤란한 상황이었다. 전쟁의 패색이 짙었던 것이다. 특히 주변 여건이 매우 안 좋았다. 하지만 일본 육군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거의 400만명에 달하는 육군이 건재했으며, 이 중 120만은 일본 본토를 수비하고 있었다.

 

1945년 2월 얄타회담1945년 2월 얄타회담


일본의 강경파들 역시 일본이 전쟁에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전쟁을 계속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최선의 종전 조건을 확보할 수 있는가였다.

 

연합군(소련은 아직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은 무조건적인 항복을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 지도자들은 전범 재판을 피할 방법, 정부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 그리고 그들이 정복한 해외 영토(한반도, 베트남, 버마,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일부, 중국 동부지방과 태평양의 섬)를 보전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더 나은 종전 조건을 얻기 위해 2가지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일본에는 2가지 전략적 선택권이 있었던 것이다. 첫번째는 외교적 방법이었다. 일본은 1941 4월 소련과 5년간 유효한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도고 시게노리 외무 대신은 스탈린으로 하여금 연합국과 일본 사이를 중재하게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좀 필요하겠지만, 이는 꽤나 그럴듯해 보였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증가하면 반대로 소련의 영향력은 축소되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일본에 너무 가혹한 조건을 소련이 막아줄 것이란 기대가 있었던 것이다.

 

두번째 계획은 군사적 옵션이었다. 이 계획은 아나미 고레시카 육군 대신을 비롯한 군부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미군의 일본 상륙에 결사항전을 펼쳐 출혈을 강요하면, 미국은 일본에 양보를 할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이었다. 이 역시 나름 일리가 있는 주장이었다. 실제로 미국이 무조건 항복을 강력하게 주장하긴 했지만, 일본 상륙 작전이 개시되면 미군 피해 역시 상상을 초월할 것이라는 우려가 실제로 있었기 때문이다.

 

히로시마에 대한 핵 공격이 이 2가지 계획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파악해보면, 미국의 핵 공격과 소련의 불가침조약 폐기 중 어떤 것이 일본의 항복에 더 큰 영향을 미쳤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8 6일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떨어졌지만, 일본의 2가지 옵션은 여전히 폐기되지 않았다. 스탈린에게 여전히 중재를 요청할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소련이 선전포고를 한 8 8일까지 일본의 지휘부는 스탈린의 중재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일본 본토에서 미군에 대한 결사항전을 하겠다는 계획 역시 핵폭탄으로 인해 그리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핵 폭탄은 일본 육군의 결사항전 준비에 그리 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이제 남아있는 도시도 몇 되지 않았지만, 참호는 굳건했고, 탄약도 부족하지않았다. 일본군 지휘부의 결사항전 의지는 히로시마에 대한 핵공격으로부터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았다.

 


소련의 참전




하지만 일본시간으로 8월 8일 오후 늦게 이뤄진 소련의 불가침 조약 폐기와 참전 선언 그리고 만주와 사할린에 대한 대대적 공격이 일본 지휘부에 준 충격은 매우 컸다. 소련이 참전을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스탈린의 중재 가능성은 사라졌다. 따라서 소련에 의존하는 외교적 옵션은 완전히 폐기되었다. 군사적 상황은 더 심각했다. 일본 육군의 정예는 대부분 본토 수비를 위해 일본 규슈로 이동했다. 대본영은 미군의 상륙지점을 규슈로 판단하고 대부분의 전력을 규슈로 집결시킨 것이다.

 

악명높았던 만주의 관동 군은 소련이 참전을 결정한 시점에는 빈 껍데기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정예와 핵심 군수 물자들은 이미 일본 본토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만주 공략에 나선 소련군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연료가 떨어질 때까지 그대로 만주를 관통했다. 동시에 10만명에 달하는 소련 제 16군은 그대로 사할린 남부를 향해 진격했다. 10일에서 14일간 일본군 잔당을 소탕한 후 그대로 홋카이도에 진격할 계획이었다. 당시 홋카이도는 제 5방면군이 동부지방에 요새를 구축하고 수비하고 있었다. 소련은 서부에 상륙한 후 제 5방면구늘 그대로 궤멸시킬 작정이었다.

 

소련과 미국이라는 2개의 초강대국의 침입을 양면에서 수비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이해하는데는 그리 큰 군사적 지식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소련의 참전은 결사항전, 1억 총 옥쇄라는 군사적 옵션을 폐기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소련의 참전으로 인해 일본의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핵 공격은 일본의 계획을 망치지 못했지만, 소련의 참전은 일본의 계획을 완전히 무력화 시켰다.

 

소련의 참전은 최대한 시간을 끌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일본의 계산을 완전히 망가트렸다. 일본의 정보부는 미군이 일본에 실제로 상륙하는데 최소한 몇 달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소련군은 빠르면 10일 이내에 일본에 상륙할 수 있었다. 소련의 참전은 일본 정부의 항복에 가장 결정적인 요소였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 정부 역시 이미 몇 달 전, 이 같은 결론을 내렸었다. 1945 6월에 있었던 전쟁지도 최고회의에서는, 소련의 참전 결정이 제국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라며, “소련과의 평화 유지가 전쟁의 지속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확인했다.

 

일본의 지휘부는 도시들을 파괴하고 있는 폭격을 일관되게 무시했다. 1945 3월 일본의 주요 도시들에 대한 공습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8월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떨어질 때까지, 전략적 관점에서 봤을 때 일본의 입장에서 이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항복하지 않는다면 재앙의 비(Rain of Ruin)”가 일본의 도시에 떨어질 것이라는 트루먼의 유명한 발언이 있었지만, 이 당시 미국의 일각에서도 더 이상 파괴할 도시가 남아 있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왔다. 8 7일 트루먼의 발언이 있던 날, 일본에는 인구 10만 이상인 도시 중 폭격을 받지 않은 곳은 단 10개밖에 남지 않았다.

 

나가사키가 8 9일 핵공격을 받았고. 남은 도시 중 4개는 홋카이도 북부지방에 있어 미군의 폭격기가 도달하기 힘든 위치에 있었고 일본의 고도인 교토에 대한 폭격은 전쟁성 장관 헨리 스팀슨의 요청으로 애초부터 폭격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따라서 트루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추가적으로 핵 공격을 할 수 있는 도시는 단 4군데에 불과했다.

 

미 육군 항공대의 공습 목표가 인구 10만 이상의 도시에서 3만 이상인 도시로 확대 된 것에서 알 수 있듯 미군의 일본 공습은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현대 사회에서 인구 3만은 도시라고 하기도 어려운 수준이다.

 

물론 이미 공습으로 인해 파괴된 도시에 다시 핵 공격을 가하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해당 도시들은 이미 평균적으로 50% 이상이 파괴된 상태라 큰 의미가 없었다. 혹은 더 작은 도시들에 대한 핵공격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폭격 당하지 않은 도시 중 3만 이상 10만 미만인 도시도 단 6군데에 불과했다. 이미 68개 이상의 대도시가 공습으로 철저히 파괴되었음을 고려해보면, 일본 지휘부가 미국의 추가 폭격 경고에 그리 큰 위협을 느끼지 않은 것도 이상하지 않다.

 


전통적 해석



이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핵공격 덕분에 일본이 항복했다는 우리의 생각은 여전히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다.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이 언제나 진실은 아니다. 히로시마에 대한 설명이 일본과 미국 그리고 우리나라에 감정적으로 얼마나 편리한 것인지를 생각해보자. 때론 사람들이 믿고 싶어하는 것이 진실이 되기도 한다.

 

또 이 같은 해석은 일본에게도 중요한 정치적 유리함을 가져다 준다. 예를 들어, 히로시마 원폭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으로부터, 일본 지도자들은 국내외적으로 여러 중요한 목표를 달성하는데 큰 도움을 얻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덴노이다. 덴노는 끔찍한 전쟁으로 일본 국민들을 끌어 넣었다. 일본의 경제는 산산조각이 났고, 황군은 비참한 패배를 했다. 사람들은 굶주렸고, 전쟁은 말 그대로 재앙이었다. 그리고 전황이 얼마나 일본에게 나쁜지에 대해 신민들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무조건 항복을 발표하는 덴노의 옥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

 

괌, 포로 수용소에서 일본군 포로들이 덴노의 라디오 연설을 듣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당신이 덴노였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모든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질 것인가? 또 잘못된 판단을 하고, 실수를 반복하였으며, 국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고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핵무기라는 끔찍한 재앙에 모든 비난을 전가할 것인가?

 

핵 폭탄과 그 위력에 대해 비난함으로써 일본의 덴노를 비롯한 수뇌부는 전쟁 내내 계속된 끔찍한 오판과 실수를 날려버릴 수 있었다. 핵 폭탄은 일본이 패배한 이유에 대한 완벽한 변명이 되었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은 최선을 다 했다며 면피할 수 있었고, 일본을 구렁텅이로 몰아 넣은 전쟁광들이 아니라 핵폭탄으로 비난이 대상이 옮겨갔다.

 

일본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핵폭탄에 전가함으로써 얻는 정치적 이득은 3가지가 있었다. 첫째, 그 덕분에 덴노제의 유지에 대한 명분이 생겼다. 전쟁의 패배가 실수가 아니라 적의 기적과 같은 신묘한 무기 때문이라면, 덴노제를 반드시 폐지해야 할 이유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둘째, 일본은 국제 여론의 동정을 얻게 되었다. 일본은 적극적으로 전쟁을 수행했으며, 침략 받은 국가의 국민들은 큰 고통을 받았다. 이는 국제적으로 당연히 비난을 받아야 할 사안이다. 하지만 세계 유일의 피폭국으로 스스로 피해자임을 자처하는 일본 정부의 태도 때문에, 일본 군대가 저지를 수많은 끔찍한 사건들이 많이 희석되었다. 일본은 유일한 피폭국이라는 이미지를 앞세워 국제적으로 동정의 여론을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했으며, 전범국으로써 받아야 할 당연한 처벌을 상당 부분 빗겨가는데 성공했다.

 

마지막으로, 원폭 때문에 패배했다 주장함으로써 점령국이었던 미국의 환심을 샀다. 일본에서 미국의 군정이 끝난 것은 공식적으로 1952년이었다. 1948년부터 1952년 까지, 미국은 일본 사회를 변화시키고 개혁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점령 초기에 많은 일본 관리들은 미국의 덴노제를 폐지할 것이라는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 보다 더 큰 우려는, 전범재판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는 고위 관리들 본인들이 전범 재판에 회부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미 유럽에서는 나치 부역자들에 대한 전범재판이 진행되고 있었다. 때문에 일본 관리들은 미국인들의 마음에 드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미국인들이 핵폭탄으로 전쟁을 끝냈다고 믿고 있는데 굳이 초를 쳐서 기분을 상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는 것이다.

 

전쟁을 끝낸 것은 원자폭탄이었다 주장하는 것은 여러 면에서 일본의 이익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는 미국의 이익에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원자 폭탄을 통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되면, 미국의 군사력에 대한 세계의 인식도 더 높아질 것이고 미국의 안보에도 도움이 된다. 맨하튼 프로젝트에 투입된 비용 20억 달러가 아깝지 않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소련의 참전 때문에 일본이 항복한 것이었다면 소련은 단 4일만에 미국이 지난 4년 동안 하지 못했던 일을 해냈다고 주장할 수 있고, 소련의 영향력과 위상은 훨씬 높아졌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2차대전 직후 바로 냉전이 시작되면서 적국이 되어버린 소련이 전쟁을 끝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 주장하는 것은 미국의 입장에선 적을 이롭게 하는 꼴 밖에 되지 않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우리가 생각하는 핵무기의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기에, 지금까지 제기된 의문을 고려해 본다면, 약간의 문제가 발생한다. 일본에 투하된 2발의 핵폭탄은 핵무기의 역할과 중요성에 대한 근거가 되었다. 기존의 재래식 무기와 차원이 다른 무기라는, 그래서 특별 취급을 받는 핵무기의 지위를 형성하는데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트루먼이 일본에 재앙의 비를 내리겠다는 위협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핵 위협의 첫 장이었다. 막강한 힘을 가진 무기를 앞세워서 국제관계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오르고자 하는 위험천만한 군비경쟁의 시발점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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