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728x90
반응형

아래에 소개하는 소설은 2000년 6월 과학학술지 네이처(Nature)지에 소개된 중국계 미국인 SF 작가 테드 창(Ted Chiang)의 단편 소설 Catching crumbs from the table이다. 

이 소설에서는 '스기모토 유전요법'을 통해 뇌를 강화한 '메타 인류'들이 과학계를 장악한 미래의 어느 시점에 대해 다루고 있다. 뇌를 강화한 이들 '메타 인류'는 DNT(디지털전이기능)이라는 특수한 능력을 통해 의사소통을 나누기 때문에 일반인들과의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소설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한 인간 과학자의 시점으로 인류 과학이 나아갈 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인류과학의 진화


Catching Crumbs from the table

테이블위의 부스러기를 줍는다는 것

 -Ted Chiang

In the face of metahuman science, humans have become metascientists.

메타인류의 과학에 직면한 인류는 메타과학자가 되었다.

놀라운 논문이 에디터에게 제출 된 지 벌써 25년이 지났기에, 그때 꽤 많이 논의 되었던 문제를 다시 한번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과학의 최전선이 인류의 이해를 뛰어넘은 시대에 인류 과학자의 역할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 논문의 저자가 스스로 논문에서 설명한 내용을 적용한 첫 번째 인류였다는 사실을 우리 독자분들도 기억하고 계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메타인류가 과학연구를 독차지하기 시작한 이래로, 우리는 DNT(digital neural transfer, 디지털전이기능)를 통하거나, 인류 언어로 번역된 이차자료를 통해서만 연구 결과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DNT가 없는 인류는 최신 연구를 따라 갈수도 없고, 연구를 위한 도구를 활용하는 것 조차 벅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메타인류는 DNT를 더욱 발전시키고, 더 많이 사용하게 되었죠. 인류를 위한 저널들은 단순히 대중화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그러나 더욱 절망스러운 것은 가장 뛰어난 인류도 최신연구를 번역하는 것 조차 버거워졌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메타인류의 과학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효용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인류 과학자들이 감수해야했던 것은 더 이상 우리가 과학 발전에 독창적인 공헌을 다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일부는 완전히 손을 땠지만, 또 다른 이들은 스스로 연구하는 것 보다는 옛날 성직자들이 그래왔듯, 메타인류의 업적을 번역하고 해석하는 일에 관심을 돌렸습니다.

이런 해석학은 처음엔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수십 테라바이트에 달하는 메타인류의 간행물이 있었고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으나, 그래도 완전히 부정확하지는 않은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 문헌들을 해석하는 것은 전통적인 고문서학자들이 해왔던 번역작업과는 조금 동떨어져 있긴 하지만 그래도 진전은 있었습니다. 최근 실험에서 10년전의 유전적 조직해석에 대한 험프리의 해석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냈죠.

메타인류의 과학에 기반을 둔 제품들이 생산되면서 일종의 제품해석학이 생겨났습니다. 과학자들은 역설계를 시도하였지만 그 목적은 경쟁력 있는 제품을 생산한다기 보다는 단순히 작동원리를 이해하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가장 흔히 쓰이는 기술로는 나노웨어 제품의 결정구조 분석이 있는데, 우리에게 분자합성기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었죠.

새로우면서도 도전적인 연구과제는 메타인류의 연구시설입니다. 최근의 연구 목표는 고비사막의 아래에 설치된 ExaCollider라고 명명된 수수께끼 같은 중성미자를 연구하는 논란이 많은 시설이었습니다. (물론 휴대용 중성자 검출기는 그 작동원리를 아직 알 수 없는 또 다른 메타인류의 물건 중 하나입니다.)

문제는, 이 같은 일들이 과학자들이 담당해야 할 만큼 가치 있는 일이냐는 것이죠. 어떤 이들은 이를 시간낭비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마치 미국 원주민들이 철로 만든 유럽의 공장을 쓸 수 있음에도 청동기를 연구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거죠. 이러한 비유는 인류가 메타인류와 경쟁할 수 있을 정도라면 좀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미 오늘날 이 풍요로운 경제는 그러한 경쟁의 가능성 조차 부정하고 있죠. 사실 과거에 하이테크놀러지 문명과 접촉한 로우테크놀러지 문명과 달리 인류가 멸종할 위기에 처해있지 않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고 봅니다.

아직까지 인류의 뇌를 메타인류처럼 강화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스기모토 유전요법은 신경발생이 시작되기 전 배아단계에서 실시해야 DNT와 호환되는 뇌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동화 매커니즘은 메타인류 아이의 부모인 인류가 매우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죠. 아이에게 메타인류 문화와 연결가능성을 허용하는 대신 부모와는 소통이 불가능한 아이로 커가는 것을 지켜보거나, 혹은 DNT와의 연결을 하지 않는 것. 그러나 후자는 메타인류의 입장에서 본다면 카스퍼 하우저가 겪었던 기회의 박탈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최근엔 스기모토 유전요법을 선택하는 부모가 거의 없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 결과 인류 문화는 미래에도 여전히 생존할 것입니다. 그리고 문화에서 핵심적인 과학적 전통도 역시 생존하겠죠. 해석학은 과학연구에서 적합한 방법이며, 인류 이해의 지평을 넓혀가는데 큰 역할을 할 것입니다. 원래의 과학이 그리하였듯이. 더욱이 인류의 연구는 메타인류가 경시하고 넘어갔던 응용방법을 찾아낼 수도 있겠죠. 메타인류의 우월함이 우리의 필요를 미처 인식하지 못하게 할 수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어떤 연구가 지능강화 요법을 통하여 단계적으로 메타인류의 수준까지 인류의 지능을 강화할 가능성을 보여줄 수도 있겠죠. 이 요법은 아마 우리의 역사상 가장 큰 문화적 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 징검다리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메타인류에겐 떠오르기조차 힘들 수 있죠. 그러기에 이러한 가능성만으로도 인류의 연구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메타인류의 과학의 성취에 겁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메타인류를 탄생시킨 기술은 원래 인류에 의해 개발되었죠. 그리고 그들도 우리보다 그리 대단한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원문: Nature - Catching crumbs from the table



특이점이 온다


제목부터 매우 의미심장하다. Catching crumbs on the table. 나중에 출판할 때는 한국 제목처럼 인류 과학의 진화로 바뀌었지만, 처음 네이쳐지에 게시될 때의 제목은 테이블 위의 부스러기를 줍는다는 것이었다.

다른 이들이 식사를 끝낸 테이블 위에 떨어진 부스러기. 다만 만찬의 뒤에 남겨진 한조각의 부스러기로 만족해야만 하는 미래 인류의 모습, 어쩌면 우리의 모습이 될 수도 있다. 

스기모토 유전요법을 통해 뇌의 기능을 진화 시킨 메타인류의 탄생으로 인해 인류의 내일은 우리의 손에서 멀어지게 되었다는 절망적인 상황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제목이다.

그래서 이 글의 부제는 ‘메타인류의 과학에 직면한 인류는 메타과학자가 되었다.’인 것이다. 

그들과 의사소통도 할 수 없는 인류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이 발견하고 개발하고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뿐. 우리는 한때 원자력학자, 우주학자, 생물학자, 물리학자였지만 이젠 메타인류가 쓴 성경을 해석하는 문헌학자에 불과하다.

우리의 현실과, 또 우리의 미래와 그리 동떨어져 있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특이점이 온다!

작년에 유행했던 말 중 이런 것이 있었다.

특이점이 온다. 기술적 특이점에서 유래한 말인데, 그 의미는 인공지능 등의 발전으로 인하여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기술을 이해하거나 따라잡지 못하는 시점을 의미한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꺾은 후 인공지능의 발전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를 반영한 유행어였다

물론 인터넷 밈이 그러듯 곧 다른 용도로 활용되긴 하였지만. 확실한 것은 인공지능의 발전이 기존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며 기술적 특이점도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라는 점이다.

예전에는 이런 생각을 했었다. 굳이 형광등이 어떻게 켜지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전원을 누르면 빛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고 이용할 수 있었다. 우리 시대의 모든 과학적 발명이 대부분 그렇다. 우리는 그 원리를 알지 못해도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고 있으며, 사실 과학자들도 자신들의 분야를 제외하면 우리와 별 다를 바가 없다

나는 이런 생각이 현대인의 삶에 적합하다고 여겼다. 고도로 분업화된 사회이기에 모두가 만물박사가 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특이점이, 인공지능의 도래가 눈앞으로 다가온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이는 꽤나 암울한 상상이 되어버렸다.

충분히 발전한 과학 기술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고 했던가. 소설속에서 메타인류의 뛰어난 과학에 마주한 인류는 새로운 것을 발견하거나 연구하겠다는 희망을 완전히 포기하고 그저 메타인류의 업적을 가까스로 해석하고 그들이 제공하는 문명의 이기에 만족을 할 수밖에 없었다

미래에 인공지능이 충분히 발전하고 과학의 최전선을 인공지능이 담당하게 된다면 우리 인류의 모습 역시 비슷하지 않을까? 혜택은 누리고 있지만 원리는 알 수 없는 AI의 발명품을 보면서 우리는 절망하게 될까? 아니면 저자처럼 “AI도 어차피 우리가 만들어낸것에 불과하다면서 정신승리를 하게 될까?

어찌 되었든 스스로 미래를 잉태할 수 있는 가능성을 거세당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인공지능의 시대는 반드시 올 것이다. 과연 우리는 계속해서 역사의 주인공으로 남을 수 있을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