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기업
남태평양 철도회사와 로스코 콘클링
먼저 기업의 이름은 릴랜드 스탠포드가 소유한 남태평양 철도 회사(Southern Pacific Railroad)였다. 1881년, 캘리포니아 주의회가 철도 자산에 대한 특별 세금을 부과하자, 남태평양 철도 회사는 이에 강력하게 반발하며 이 과세 법안이 미 수정헌법 제 14조에 어긋난다 주장했다. 수정헌법 제 14조는 남북전쟁 이후 해방 노예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헌법에 추가되었고, 모든 “개인”에게 “평등한 법의 보호”를 보장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스탠포드의 남태평양 철도회사는 회사 역시 하나의 “개인”으로서 헌법이 인종에 근거한 차별을 금지하는 것처럼, 기업의 업종에 따른 차별 역시 있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수정헌법 제 14조
제1절 : 미국에서 태어나거나, 귀화한 자 및 그 사법권에 속하게 된 사람 모두가 미국 시민이며 사는 주 시민이다. 어떤 주도 미국 시민의 특권 또는 면책 권한을 제한하는 법을 만들거나 강제해서는 안 된다. 또한 어떤 주에도 법의 적정 절차 없이 개인의 생명, 자유 또는 재산을 빼앗아서는 안 되며, 그 사법권 범위에서 개인에 대한 법의 동등한 보호를 거부하지 못한다.
남태평양 철도 회사를 대표하는 수석 변호사는 로스코 콘클링이었다. 콘클링은 전직 공화당의 대표였으며, 대법관에 2차례나 지명된 저명한 인사였다. 콘클링은 2차례 모두 이를 거부했는데, 2번째는 상원의 인준까지 받은 후였다. 따라서 당시 사법부에서는 콘클링을 변호사라기 보다는 법관 동료로 보는 분위기도 있었다.
로스코 콘클링
하지만 이 같은 믿음은 배반당했다. 남태평양 철도 회사를 변호하며 법정 앞에 선 콘클링은 놀라운 얘기를 풀어놓았다. 1860년대, 그가 아직 젊은 의원 시절, 콘클링은 의회 개헌특위에서 일하며 수정헌법 제 14조의 초안을 작성하는데 참여했었다. 남태평양 철도 회사의 법정다툼이 진행되고 있던 당시만 해도, 당시 개헌 특위에 참여했던 의원들의 다수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런데 콘클링은 당시 개헌 특위 위원들이 마지막 순간에 기업까지 법의 보호 아래 넣기 위해 14조의 “시민(citizen)”이라는 단어를 “개인(person)”으로 바꾸었다고 법정에 증언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개인”이란 “자연인은 물론이고 인공적인 개인을 모두 포함”하는 단어라는 것이었다. 콘클링은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강력한 증거를 제시했는데, 당시 위원회의 토의 과정을 기록한 출판되지 않은 회의록이었다.
몇 년후, 역사학자들은 콘클링이 제시한 회의록은 실재하는 것이었지만 그가 주장한 내용은 사기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회의록은 진짜 당시 개헌 위원회의 토의 과정을 기록한 것이 맞았다. 하지만 개헌 위원들이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시민”을 “사람”으로 바꿨다는 내용은 회의록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심지어 수정헌법 14조를 논의하면서 기업의 권리에 대한 어떤 논의도 없었다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이후, 콘클링을 제외한 당시 어떤 개헌 위원도 기업이 수정헌법 14조의 보호 대상이라는 주장을 하지 않았다.
콘클링의 속임수가 그 당시에도 밝혀졌다고 의심할 만한 정황이 있다. 판사들은 이 문제가 우연히 해결되기 전까지 3년 동안이나 판결을 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직후, 남태평양 철도 회사의 또다른 사건이 다시 대법원에 올라왔다. 이번에도 역시 비슷한 법적 쟁점에 관한 문제였다. 남태평양 철도 회사는 동일한 변호인단을 구성했지만 콘클링은 제외되었다. 변호인단은 콘클링이 주장한 회의록에 관한 내용을 답변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만약 변호인단이 콘클링의 주장을 믿었다면, 이 같이 중차대한 사안을 답변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에 해당할 터였다.
대법관 스티븐 존슨 필드
두번째 사건에 대한 판결에서 법원은 “사람”에 기업이 포함되는지에 대한 판단은 유보했다. 그런데 이 결정을 두고 대법원의 법관이었던 스티븐 존슨 필드는 “오늘날 같이, 대기업의 영향력이 유례 없이 커진 이 시점에, 중대한 헌법적 의문을 회피하는 것”에 대한 분노를 표하며 기업이 “사람”에 포함되는지 여부를 신속하게 결정할 것을 주장했다.
스티븐 존슨 필드
언제나 총을 휴대하고 다녔던 필드는 현직에서 구속된 유일한 대법관이었다. 살인 혐의였다. 필드 대법관은 살인 혐의에서는 무죄를 선고 받았지만, 적어도 현대적인 기준에서 볼 때 남태평양 철도 회사 사건에 관련해서는 심각한 윤리적 문제가 있었다. 필드는 를랜드 스탠포드의 절친한 친구였고, 이 사건에서 어떤 변호인단을 꾸릴지에 대한 조언을 했다. 게다가 첫번째 사건이 아직 진행중일 때, 남태평양 철도 회사의 변호인단과 내부 정보를 공유하기도 했다.
도금 시대(Gilded Age) 당시 미국의 사법 윤리는 아직 정립되지 못한 상태였고, 사회주의의 확산을 두려워하던 필드는 이 같은 문제에 있어서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철도회사의 재산에 특별세를 부과하는 것은 그의 생각으로는 “백인이나 노인이 가진 재산은 가만히 놔두면서 흑인이나 젊은 사람이 가진 재산에는 특별세를 부과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대법원의 결정은 판결 서기관(Reporter of Decisions)라는 행정관이 편찬하는 공식 보고서를 통해 공개된다. 전통적으로 서기관은 토론의 시작부터 끝까지 대법관들의 의견을 요약하고 정리한다. 1880년대 당시 서기관은 밴크로프트 데이비스라는 자였는데, 남태평양 철도 회사 사건에서 엄청난 오류를 범했다. 대법원이 “기업은 수정헌법 14조에서 말하는 사람에 포함된다”라고 기록한 것이다. 이는 명백히 잘못된 것이었는데, 밴크로프트 데이비스가 한때 뉴버그 앤 뉴욕 철도 회사의 사장을 역임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것이 단순한 실수가 아닌 고의적인 오기로 의심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드는 데이비스의 이 엄청난 오류를 기회로 여겼다. 몇 년 후, 전혀 상관 없는 다른 사건의 판결에서 필드는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기업은 수정헌법 제 14조가 말하는 사람에 포함된다. 이는 지난 산타 클라라 카운티 vs 남태평양 철도 회사 사건에서 확인되었다.” 물론, 필드는 해당 사건에서 이 같은 확인을 하지 않았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친기업 정책
그리고 필드의 수는 제대로 먹혀 들었다. 다음 수년 동안, 이 판례는 대법원을 포함한 미 전역의 법원에서 반복되어 인용되었다. 기업은 수정헌법 제 14조에 의해 동등한 보호를 받는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 판례는 20세기 초반, 기업에 대한 각종 규제를 철폐하는데 아주 좋은 근거가 되었다. 연방아동노동법, 토지사용제한법, 근로기준법이 이 판례에 근거하여 철폐되거나 완화되었다. 한편, 악명높았던 플레시 vs 퍼거슨(1896) 사건에서 기업이 사람의 범주에 포함된다는 판결을 내렸던 재판부는 흑인의 법적 권리를 보호하는 것을 거부했다. 수정헌법 제 14조의 원래 의도가 이들 흑인의 시민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수정헌법 제 14조가 도입된 1868년 이후 1912년까지 연방대법원이 판결한 흑인의 권리에 관한 사건은 28개에 불과했으나, 기업의 권리에 관한 사건은 무려 312개에 달했다.
1882뇬 로스코 콘클링이 기업이 수정헌법 제 14조가 말하는 개인에 포함된다는 주장을 처음 내놓았을 때, 뉴욕의 한 신문사는 미래를 예견하는 것 같았던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기사를 냈다. “기업의 시민권” 실제로 남태평양 철도 회사와 변호인단은 아주 교활한 법적 기만과 뻔뻔한 대법관의 도움을 받아 수정헌법 제 14조를 소수자의 인권을 위한 조항이 아닌 대기업과 자본가들을 위한 조항으로 바꾸는 연금술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법인”의 유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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