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 스미스라는 이름의 신화
만약 당신이 들어본 경제학자의 이름이 단 한 명 뿐이라면, 그건 분명 아담 스미스일 것이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경제학자이자, 경제학이라는 학문을 창시한 경제학의 아버지이니 말이다.
게다가, 아담 스미스라는 이름은 단순히 한 명의 경제학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만으로도 정부의 통제보다 시장이 우위에 있음을 설파하는 메신저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즉, 아담 스미스라는 이름은 경제학의 창시자임의 동시에, 정치적 우파의 시초이기도 하다.
아담 스미스
하지만, 널리 알려진 이런 믿음과는 달리 아담 스미스가 경제학의 창시자이며 정치적 우파의 시초라는 주장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가 실제로 주장했던 것과 전혀 상반되는 것이기도 하다.
경제학자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한 스미스는 사실 삶의 대부분을 학문적 사상가로 지냈다. 글래스고 대학의 도덕 철학 교수로 임용된 스미스의 강연 내용 대부분은 윤리학, 정치학, 법학 그리고 수사학에 관련된 것들이었으며, 명성을 얻게 된 것도 그의 첫번째 저서 도덕감정론(1759) 덕분이었다.
스미스는 누가 뭐라해도, 철학자였다. 물론 경제학이라는 개념이 제대로 정립된 것은 1790년 아담 스미스가 사망하고도 1세기가 더 지난 19세기였지만 말이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물론 경제학자로서 스미스의 명성이 완전 근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도 가장 많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전설적인 저서 '국부론(1776)'이 경제학의 정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1,000페이지에 달하는 역사, 윤리, 심리학 및 정치철학에 관한 이 저서는 현대 경제학의 고도의 수학적 정밀성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국부론은 한때 유행했지만 20세기 후반에 급속한 쇠퇴를 겪은 정치경제학 분야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러나 스미스의 명성은 초기부터 널리 퍼졌다. 국부론 출간직후 휘그당의 당수 찰스 제임스 폭스가 영국 의회에서 이를 소개하기도 했다. 역설적이게도 폭스는 나중에 국부론을 하나도 읽지 않았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사실 스미스 역시 폭스처럼 무작정 떠받드는 사람들이 실제로 국부론을 읽고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나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의심했다고 한다. 스미스는 국부론이 당대 영국 상업 시스템 전체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다고 나중에 회고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의회에서는 스미스가 그토록 비판했던 시스템을 띄우기 위해 계속해서 스미스를 인용했다.
당대에 받은 찬양에도 스미스는 그리 탐탁치 않아 했는데, 현대에 아담 스미스라는 이름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알았더라면 아마 절망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이름이 1980년대 초 부상하기 시작해 오늘날까지 정치와 경제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대명사가 된 것은 어찌 보면 운명일지도 모른다.
미국의 로날드 레이건 대통령과 영국의 마가렛 대처 총리가 주도한 신자유주의 운동은 사실 꽤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20세기 초반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루드비히 폰 미제스로부터 시작해 1980년대 시카고 학파의 밀턴 프리드만과 영국의 정치인 케이스 조셉에 이르기까지, 학계, 씽크탱크 그리고 정,재계는 몽 페를랭 소사이어티(Mont Pelerin Society)로 대표되는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통해 현실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몽 페를랭 소사이어티는 한국에서도 회의를 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수시로 스미스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가 시장만능주의를 창시했다 주장하고, 대처와 레이건이 그랬듯 국가의 한계를 다시 축소시키고 시장의 자유를 확대하려는 우파 운동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1970년대 영국의 민영화를 이끌었던 우파 씽크탱크의 이름이 아담 스미스 학회(Adam Smith Institute)라는 점은 이 같은 경향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물론 스미스가 말한 “자연적 자유의 체제(The System of Natural Liberty)"가 현대 신자유주의와 통하는 면이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표현을 넘어 깊이 파고 들어간다면, 자유사회에서의 시장의 역할에 대한 스미스의 미묘하고 회의적인 견해와 거의 종교와 가까워 보이는 자유시장 지상론자들이 말하는 스미스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부가 자유롭고 번영하는 경제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라 생각하며 간섭을 받지 않길 원하는 자본가들은 스미스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냈지만, 아담 스미스는 이들과는 다른 그림을 그렸다. 스미스가 생각하는 가장 큰 위험은 정부의 간섭이 아니라, 정부가 상업 엘리트들에게 포섭당하는 것이었다.
상업 엘리트와 보이지 않는 손
상인들이 경제를 장악했던 중상주의
그 결과, 일반 시민들은 독점시장에서의 담합된 비정상적으로 높은 상품 가격을 받아들여야 했으며, 그들의 고용과 생계조차 몇몇 대자본가들의 자비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스미스는 이것을 자유에 대한 모욕으로 여겼고, 국가의 부를 증대시키는데있어 가장 큰 장애물로 여겼다. 물론 중상주의는 일부 대자본가들과 상업 엘리트들에게는 큰 이득을 주었고, 당연하게도 이들은 이 시스템을 유지하려 했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일반 시민들의 편에서 탐욕스러운 상업 엘리트들에게 일침을 날렸다.
같은 업계의 사람들끼리는 좀처럼 만나지 않는다. 심지어 흥겹게 떠들며 노는 일도 거의 없다. 하지만 그들이 대화한다면 그건 대중에 대한 음모 혹은 가격을 올리기 위한 작당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상인들은 수백년 동안이나 이 같은 불공정한 구조에서 발생하는 이익을 유지하기 위해 애써왔다. 특히 그들은 ‘무역 균형’이라는 논리를 발명하고 전파하여 거의 신념과도 같은 믿음으로 발전시켰다. 무역 균형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각 국가의 부는 보유한 금의 양으로 구성된다는 것이었다. 상인들은 이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국가가 부유해지려면 가능한한 수출을 늘리고 수입을 억제하며 무역 흑자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체제에서 상인들은 국가에 의해 독점권을 보장받으며 국가의 부를 늘리기 위해 노력하는 공공의 봉사자로 스스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미스가 장황하게 설명했다시피, 이는 완벽한 기만이었다. 진짜 필요한 것은 국가 간의 무역을 완전히 개방하고, 생산성을 향상시켜, 상인들이 아닌 사회 전체의 부를 증대시켜 모두에게 이득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중상주의’가 낳은 더 최악의 산물은, 스미스의 친구이자 철학자이며 역사학자인 데이비드 흄이 말한 ‘무역의 질투, Jealousy of Trade’였다. 스미스는 국가 간의 우애와 상생의 수단이 되어야할 무역이 전쟁의 수단으로 비화된 것을 안타까워했다. 상인들은 공격적인 민족주의를 부르짖으며, 국내 소비자와 시민들에게 이웃 국가 간에 평화로운 무역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궁극적인 이득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감추었다.
식민지 쟁탈을 위한 전쟁이 빈발했다.
상인들의 음모 때문에 유럽 대륙의 평화와 안정은 번번히 가로막혔다. 상인들은 국내시장을 보호하고 반대로 해외 시장에 접근하기 위해 정치인들을 선동해 전쟁을 일으켰다. 어쨌거나 국가와 군사력에 의해 보호받는 독점시장에서 꿀 빠는 것이 가격과 품질로 피터지게 경쟁해야 하는 개방시장보다 편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인들은 지속적으로 국가와 정치인을 매수하고 시민들을 속이며 사적인 이득을 취하는데 열중했다.
그러므로 스미스의 가장 유명한 아이디어인 ‘보이지 않는 손’은 누군가에게 통제되지 않는 시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상업 엘리트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물론, 시장이 스스로 작동하면서 최적의 상황을 만들어 내리라는 희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스미스는 정치인들의 인위적인 개입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손’이 언급된 국부론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스미스가 의도했던 바는, 단순한 정치인들의 개입이 아니라, 상업 엘리트에게 매수되어 그들의 이익을 위해 공공과 국가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국가의 개입을 규탄하는 것이었다.
재벌과 '보이는 손'
이러한 아담 스미스의 의도를 생각해 본다면, 오늘날 재벌과 민간 대자본가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시장에 대한 규제에 저항하며 ‘보이지 않는 손’을 앞세우고 있다는 것은 꽤나 역설적인 상황이다. 이는 상인들이 마음대로 날뛰는 것을 제어하고 싶어 했던 스미스의 원래 의도와 완벽하게 상반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많은 경우와 같이, 개인은 바로 그때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자신이 의도치 않았던 목표를 달성하게 된다
스미스가 시장의 효율성에 대해 논하면서 위와 같이 언급했던 것은 상인들이 조직한 독점시장과, 상인들이 동원한 국가권력으로부터 ‘개인’을 해방시키고자 하기 위함이었다. 즉, 보이지 않는 손은 국가 개입이라는 문제를 걱정한 것이 아니라, 국가 권력이 상업 엘리트 즉, 오늘날로 말하자면 재벌에 의해 매수 당한 것을 규탄하는 것이었다.
상업 엘리트에게 통제당하고 있던 당시의 '보이는 손'
스미스는 대자본가들과 상인들이 유럽을 끝없는 전화와 분쟁으로 몰아넣은 것에 대해 분개했고 또 절망했다. 따라서 그는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구성원들에게 부가 돌아갈 수 잇는 자유로운(Free가 아닌 Liberal) 시장을 대안으로 주장했다. 물론 이는 유토피아와 같은 주장이다. 역사에서 알 수 있듯, 우리는 아담 스미스의 시대보다는 상대적으로 시장의 자유를 누리고 있긴 하다. 그러나 아담 스미스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상업 엘리트의 음모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국가 권력과 재벌, 대기업들과의 밀월은 여전히 우리 시대의 정치와 경제의 현실을 규정하고 있다.
어쨌든, 스미스가 그토록 적대시했던 상업 엘리트들과 레이건과 대처가 앞장서 설파한 신자유주의에서 말하는 경제 성장의 주역인 경제인들은 너무나 거리가 멀어졌다. 신자유주의에서는 경제인들이 마음껏 경제를 발전시키도록 하려면 정부의 간섭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스미스는 건강한 경제를 가진 자유로운 사회는 ‘보이지 않는 손’이 말 그대로 역설적인 위대한 일을 수행할 수 있도록 상업 엘리트들에게 족쇄를 채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세간의 평과는 다르게 스미스를 정치적 좌파의 창시자로 봐야 할까? 아니다. 이 같은 결론으로 끝맺음 하기에는 조금 상황이 복잡하다.
스미스가 비록 상인들이 음모를 통해 사회의 공익을 훼손하면서까지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치인들이 민간 부분인 상인들의 경제활동을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다는 환상 따위는 가지지 않았다.
영국 동인도 회사가 인도 벵골 지방을 통치했던 것처럼 상인들이게 정치권력이 주어지면 어떤 끔찍한 결과가 발생할지는 분명하다. 이는 말 그대로 재앙이었다. 상인들은 결코 공익에 봉사하는 책임감 있는 정치인이 될 수 없다. 독점을 갈망하는 상인들의 탐욕은 그들이 지배할 국가에 살고 있는 모든 존재에 거대한 재앙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인으로 상인들을 대체하는 것 역시 말이 안된다. 즉, 정치인이 체계적으로 경제 문제를 다루기 위한 시스템을 운영하려 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이다. 정치 지도자들은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빈번하게 경제를 직접 운영하려 시도하긴 하지만, 실패로 끝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스미스에 따르면, 정치인들은 자발적으로 자유로운 교류를 통해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는 개인들에 비교하면 경제 문제에 훨씬 미숙하다. 결과적으로, 무역문제에 있어서 수많은 구매자와 판매자가 개입되어 있는 네트워크를 정치인들이 중앙집중식 명령을 통해 대체하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네트워크에는 사익을 추구하는 상업 엘리트의 활동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스미스의 최종적인 결론은, 상인들은 비록 잠재적으로 유해하지만, 경제를 작동하게 하는데 필수 불가결하다는 것이었다. 상인들의 사악한 활동을 어떻게 제어할 수 있는지 방법을 찾는 것이 훌륭한 정치인과 입법자들의 역할인 것이다. 즉, 스미스는 상업 엘리트가 합법적인 상업활동을 영위할 수 있도록 자유를 부여하면서도, 이러한 활동이 대중에 대한 착취의 수단이 되지 않도록 통제하면서 정치인이 균형을 잡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말로 하면, 스미스의 상업 엘리트에 대한 견해와 오늘날 신자유주의가 우리에게 주입한 ‘경제 성장의 주역’으로서의 경제인의 이미지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다. 오히려 경제인들에게 막대한 자유를 부여하는 것을 넘어, 정치와 결탁이 발생하도록 방관하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꼴이란 경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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